현자 시인

현자 시인

[동양일보]부모님 돌아가신 후, 친정집 구옥舊屋과 텃밭을 가꿔오고 있다. 칠순이 넘어서까지 농사 외길을 고집하셨던 아버님과, 굽은 등 펼 날 없이 일하셨던 어머님 덕분으로, 우리 칠남매는 1960년대 보릿고개도 그럭저럭 큰 배고픔 없이 잘 지났다.

아버님은 농사일과 땅에 대하여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그 이상으로 경외심을 갖고 땅 한쪽 벼 포기 하나하나를 당신의 살점이요 자식처럼 보살피셨다.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가 하늘처럼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늘 흙투성이 잠방이에 밀짚모자를 쓴 아버지를 다림질 잘된 양복바지에 하얀 와이셔츠, 하이칼라에 반들반들한 구두를 신고 읍사무소를 다니시던 친구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이유 없는 투정을 부렸던 것은 지금도 죄송하기만 하다.

칠남매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효도를 하였지만, 아버지가 논두렁 밭두렁은 물론 쇠꼴이며 푸작나무 베는 산등성이까지 네 명의 아들들보다도 막내딸 나를 더 품고 다니셨고, 어머니는 나에게 은근히 저 아래 텃밭 이어주기를 바라신지라 친정집 텃밭 가꾸는 일이 자연스레 내 일이 되었다. 500여 평이라 이웃집들 흉내를 내다보면 때로는 텃밭이 취미가 아닌 농사로 버거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퇴직한 남편이 도와줘서 도회의 형제들과 소소하게 나눠 먹는 기쁨은 한여름의 수고를 위로해 주기에 충분하다.

소만小滿을 지나 망종芒種, 하지夏至가 가까운 들녘과 뒷산 숲은 오랜 가뭄 끝 어제 내린 단비를 흠씬 머금고 한층 푸르러졌다. 사방이 전날 아버지가 썩썩 베어 눕히던 그 풀냄새로 가득하다. 코를 벌름이다 보면 아카시아, 시계풀꽃 향기, 뒷산 빽빽이 덮은 갈참나무 싱그러운 초록의 내음. 이미 오솔길이 사라진 연골고개에 무더기무더기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주인 잃은 밤나무꽃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힘들여 귀 기울이지 않아도 텃밭 가까이 와서 우는 청아한 꾀꼬리들의 화음과, 재재거리며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어린 새떼들을 보다보면, 나는 마치 수도승처럼 욕심도 사라지곤 한다.

텃밭을 하던 초기에는 제초제에 허물어지는 둑성이를 살린다고 온갖 풀들을 인심 좋게 살려 뒀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맨 처음 돋아나온 꽃다지와 볼 부비고, 꽃샘추위에도 앙증맞게 버티고 버티다가 키 큰 봄풀들이 자라나기 전 얼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양을 얼마나 기특해 했는지. 그 뿐이랴, 부지런한 냉이, 꼬딱지풀, 개알꽃….

하지만 텃밭이 풀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장마 끝에 알았다. 하지녁 단내나는 가뭄 속에서 먼지 풀풀 날리는 밭 가장자리 한 올 실뿌리에 기대어 배실대던 바랭이풀. 그러나 녀석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던 오월의 자태가 아니었다. 물기를 실컷 머금고는 사방으로 손발을 쫙쫙 뻗치고, 거기다 마디마디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한 가닥씩 호미로 긁고 힘들게 쥐어뜯어야만 겨우 뽑혔다. 이웃들이 팔월 불볕더위 아래 시절 없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한사코 말릴 때까지 풀을 뽑았지만 결국은 지고 말았다. 에라 손들었다.

포기한 내 마음을 알았는지 이제 눈치 볼 것 없이 자리를 펴고 자라 급기야 손대기 어려운 덤불을 만들더니 가을이 되자 깨알 같은 씨앗을 우수수 쏟아놓는 것이었다. 아무리 호미 장군이 되어 보초를 서도 당해내지 못했다. 살벌한 예초기와 심지어 제초제의 핍박 속에서도 풀들은 살아남아 주렁주렁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공생共生하자! 지금은 풀도 적당히 맨다. 풀 뿐만 아니라, 콩밭에 드나드는 산비둘기도, 옥수수밭의 고라니도, 고구마밭 덩치 큰 멧돼지들도 이제 다 이웃이다. 콩 한 쪽, 옥수수 한 톨이라도 나눠 줄 것이 있는 삶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파종 시기를 못 맞춘 이웃에게 그제 캔 감자를 한 바가지 드렸다. 닭을 풀어놔 상추밭을 망쳐버린 나는 윗집 상추밭을 내 밭처럼 들랑거린다. 그래 산다는 것은 나 혼자 떠나는 탐험이 아니다. 천천히 함께 가는 여행이 아닐까. 나도 어쩌면 지상에 던져진 풀씨 하나, 햇빛 한 옹큼도 조금씩 서로 양보하며 함께 잎을 피우고 싶다. 가끔씩 텃밭을 가꾸다 건져 올리는 졸시拙詩에 감사하며,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지금, 그 무엇보다도 마음의 텃밭을 더욱 정갈하게 가꿔야겠다.



<요즈음>

눈이 흐려진 만큼/안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고/생각은 나날이 단순해져서 머리도 맑아졌다/한발 물러나 마음으로 바라보면/사람이든/짐승이든/텃밭에 심술부리던 잡초들마저 다 어여쁘다/절절 끓는 불구덩이 여름을 이겨낸/땀방울 바가지로 쏟아낸/소금기 건건한 이마를 쓸며/그 모든 생生에게 박수를 보낸다/가을바람 앞에 해진 옷자락을 여미며/다리 힘은 적당히 풀려 느리게 가라 하고/목울대도 가라앉아 나직이 말하라 한다/나이들면서/그 무엇도 미워할 근력筋力이 없는 것은/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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