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례 시인

조성례 시인

[동양일보]4개월째 매주 월요일이면 서울에 있는 통증의학과에 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의사의 말로는 등 근육이 없고 인대가 약해서라는 진단을 준다.

근육은 운동과 노력으로 생길 수 있지만 인대는 자연생성이 안된다며 인대강화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시작한 병원 나들이, 어깨 죽 지부터 아래로는 엉덩이까지 프롤로 주사를 맞고 나오면 정작 허리와 등의 아픔보다 주사 놓은 자리가 더 아프다.

얼음찜질을 하고 누워 있어도 연 사흘은 겨우 밥이나 끓여먹고 엉금엉금 기어서 눕곤 한다.

통증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다시 서울로 가는 길, 등이 너무 아파 버스를 타고 오가기엔 역부족이고 자주 마려운 소변의 느낌 때문에 거의 기차를 이용한다.

기차에 오르면 손에 손에 커피나 빵 등 먹을 것을 들고 올라오는 사람들, 반백의 늙은이가 보기엔 그들이 젊어서 읽었던 파리 쟌느처럼 멋지기도 하고 치료를 받고 몰려오는 통증과 피로는 믹스커피를 딱 한 잔 마셨으면 싶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봐도 믹스커피를 든 사람은 없다. 어쩌면 뚜껑 덮인 컵에 믹스커피도 있겠지만 커다란 머그잔에 빨대를 꽂아서 한껏 멋을 내는 사람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들이 그렇게 보인다.

서울역에는 파리크로아상이 있고 빵과 함께 많은 종류의 커피가 메뉴판에 적혀 있으나 “ 믹스 아님 맑은 커피”라는 대명사로 부르는 내게는 모두가 낯선 이름이다.

검색도 하고 딸에게 물어도 보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력은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하기엔 영 용기가 부족하다.

평소에 좋아하는 소보루 빵 한 개만 달랑 사고 나가서 물을 사들고 오던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맑은 커피를 주문을 했다.

속으로 이제 나도 문화인의 반열에 든 것인가? 스스로 자문하면서 기차를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뜨거운 커피가 찔끔찔끔 흘러서 바지까지 떨어진다.

커피가 묻은 흰 바지를 자리에 앉아서 여러 번 닦아내도 말끔하게 닦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종업원을 욕을 한다.

이 뜨거운 염천에 펄펄 끓는 커피냐고? 뚜껑을 꼭 닫아주지 이렇게 엉성하게 닫아서 쏟아지게 하면서,

당연히 시원한 냉커피려니 한 나는 은근히 화가 났다.

에어컨도 별로 시원하지 않은 데다 빨리 식지 않는 커피의 많은 양이 더욱 화를 돋웠다.

옆자리 승객에게 부끄러워서 뚜껑을 살며시 열어 탁자에 얹어놓고 식을 때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ktx환승역인 오송 역에 도착하도록 다 마시지 못한 커피는 기어이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다.

딸에게 얘기하니 “엄만 아이스라는 말을 했어야지 아무 말도 안 하니 당연히 뜨거운 커피를 주지요”

엄마 몇 번을 얘기했는데도 기억을 못 하냐고 오히려 핀잔을 준다.

그다음부터는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오기로 “맑은 커피 차가운 것으로 주세요” 당당히 말한다.

어느 날 보니 내 뒤의 여성도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주문을 한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슬몃 웃었다.

나는 지금도 당당히 ‘차가운 맑은 커피요’하고 주문을 하면서 모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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