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수필가

김정옥 수필가

[동양일보]여자 넷이 만났다. 30여 년 이어오던 산악회가 해산되고 나서 결성된 작은 모임이다. 좋은 날 만나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도 하고 전망 좋은 둘레길을 걷기도 한다. 자박자박 걸으며 이야깃거리를 푸는 것도 재밌다. 삐릿 삐릿 파랑새 소리가 청량하다. 자줏빛 싸리나무꽃에 바투 다가가 눈 맞추고 큼큼거리니 오감이 열린다. 희뿌연 회색빛 도시에서 한나절 동안 해방이다.

K가 그간 있었던 일을 남에 이야기하듯 말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예쁜 꽃을 봐도 시들하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봐도 무심해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우울의 늪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최근에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 속에 그녀의 해답이 있지 않을까.

드라마 주인공 미정은 비정규직이라 차별받고, 남자친구에게 사기당하고, 무능력한 팀장 때문에 신박한 디자인이 빛을 못 본다. 자본주의 정글 같은 세상에서 버텨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래도 한발 한발 꾸준히 함께 가보자며 추앙하는 구 씨와 마음을 다잡는다.

<나의 해방일지>의 인물들은 대부분 직장인이 그렇듯 일에 짓눌려 있다. 장거리 출퇴근에 시달리고 수시로 야근하여 몸이 파김치가 된다. 비정규직의 부당한 대우와 승진의 무게감에 눌려 힘들다. 때로는 동료 간의 불편한 인간관계가 일보다 더 버겁다. 도시 속 고층빌딩의 위용과 위악적인 수직 구도에 질식할 것만 같다. 그들은 순간순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많은 열매를 매달아 지지대 없이 설 수 없는 고추처럼 제 몸 곧추세우고 살아가기에 삶이 너무 고단하다. 무거운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해 누군가는 추앙을 택하고, 아무나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연인을 갈아치우기도 한다. 본인의 핸디캡을 벗어나려 애쓰기도 하고, 누군가는 꽁꽁 감춰뒀던 아픈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퇴근 후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 삼아 동료들 뒷담화를 하며 어긋나고 비틀어진 일상에서 중심을 잡기 위하여 기를 쓴다.

드라마 이야기를 들은 K가 “아, 바로 그거예요. 해방이요.” 하며 반가워한다. 그녀에게 둘러싸인 벽을 뚫고 나가고 싶은데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를 그토록 우울하게 하는 구속이 무엇일까.

세상을 살다 보면 구속 아닌 것이 없다. 회사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하물며 친구나 부부조차도 얽어매고 부담을 준다. 굴레를 벗고 싶다고 마음대로 벗을 수도 없는 것이 삶이다.

돌이켜보면 많은 굴레에 갇혀 살았다. 어릴 때는 착한 딸이어야 하고 결혼 후 남편에겐 미더운 아내가 되고 싶었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좋은 어미가 되어야 했다. 현직에 있을 때는 괜찮은 선생이어야 한다고 수시로 속박했다. 지금은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나를 옥죈다. 턱에 닿지 않는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아프고 힘들다.

드라마 속 미정이가 하루에 5분씩 설렘으로 채우자며 힘든 굴레를 벗어나듯, 나도 채워보자. 내 차가 신호등이 끊어지기 전에 마침맞게 교차로를 건너면 10초 설레고, 가물가물하던 단어가 형광등 불이 켜지듯 번쩍 떠오르면 1분 기분이 좋다. 외출할 때 엘리베이터가 집 앞 층에 딱 서 있으면 30초 행복하고, 뒷동산에 노란 금계국이 무리 지어 하늘거리면 반나절이 설렌다. 그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그러모아 나를 채우며 삶의 옥죄임에서 벗어나리라.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