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동양일보]무더운 날씨다. 큰 나무가 우거진 등산로는 그늘이라 시원했는데 숲길을 벗어나 평지로 내려오니 금방 찜통 같은 더위로 온 몸이 뜨거워진다.

길가에 잡초들마저 불볕 같은 더위에 기운을 잃은 모습이다. 상추, 고추, 가지 등이 심어진 채마 밭 가장자리에 보라색과 흰색 도라지꽃이 별을 닮은 몽우리를 터트렸다. 막 피어난 도라지꽃은 더위가 대수냐는 듯이 종 모양을 하고 반짝이며 눈길을 끈다.

도라지꽃은 언제보아도 예쁘다. 흰색 꽃은 청초해보여 그자체로 아름답고, 보라색 꽃은 만지면 보라물이 들것처럼 색이 강렬해 마음에 진하게 남는다. 두 가지 색이 적당히 어우러진 꽃을 보며 도라지꽃이 한가지색으로 핀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닌 듯 했다.

흰색 꽃, 보라색 꽃만 피어있는 도라지 밭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일까. 꽃 색을 구분하여 심느라 정성을 더 기울였을 터인데 어쩐지 보라색 꽃도 흰색 꽃도 뭔가 빠진듯해 아쉬움이 남았다.

도라지꽃을 보면 무더운 여름이 먼저 떠오른다. 농촌의 칠월은 논밭에 어느덧 농작물이 가득 자라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잡초들도 부지런히 뽑고 나면 잠시 틈이 나는 계절이다.

친정어머니는 이맘때가 되면 젖먹이 동생을 고모나 작은엄마께 맡기고 산으로 가셨다. 이산저산을 누비며 약초를 캐기도 하고 아직 덜 익은 산딸기도 따오셨다. 어머니는 온종일 산속을 헤매다 집에 오시면 먼저 암죽으로 허기를 달래던 아기를 안아 젖을 물려야 했다.

어머니의 허리춤에 매여 고생을 같이한 싸리나무로 만든 다래끼는 마루도 못 올라오고 댓돌위에 놓여졌다. 어머니는 젖먹이 아이를 두고 종일 집을 비운일이 미안해서인지 아기를 어르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가 들고 오신 보자기나 다래끼 안의 수확물들이 궁금했다. 아직 덜 익은 산딸기가 대부분이고 가끔은 지치紫根(자근)나 오래된 더덕 등 귀한 약초들이 한 두 뿌리씩 있기도 했다.

산딸기는 살짝 쪄서 말려놓으면 한약재로 귀히 쓰인다고 약초장수들이 사가곤 했다. 언제나 다래끼 안에 빠지지 않고 담겨오는 것은 도라지였다. 껍질을 까서 나물로도 먹고 약초로 팔수도 있었다.

도라지꽃은 느닷없는 채취에 꽃잎을 늘어뜨리고 울상을 짓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때의 도라지꽃은 어려운 삶을 헤쳐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과도 닮아보였다.

농촌에 칠월은 돈 나올 곳이 없다는 것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겨우 감자와 밀, 보리타작을 하였으나 많은 식구의 식량에 보탬이 될 뿐이었다. 봄누에를 쳐서 약간의 목돈을 만지긴 해도 생활비로 쓰기에는 단솥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

아직 두 삼촌과 맏딸인 나도 초등학생이고 아래로 동생들이 있으니 날마다 도시락준비와 더불어 기성회비나 각종 학용품 살돈이 필요했다. 우리는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입 벌리는 제비새끼 들 마냥 아침마다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빈 몸으로 산길을 걷는 것도 힘들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이즈음이다. 어머니와 칠월, 그리고 도라지는 자연적으로 연결되는 그림이다. 고운 보랏빛이 가슴에 아리게 남아 나를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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