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숙 시인

이운숙 시인

[동양일보]오늘도 서양란과 눈을 마주치며 아침인사를 했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면 사랑스럽다.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처럼 나도 식물과 사랑에 빠지고 있다. 돌아보니 나의 식물 키우기는 암 진단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분하나로 시작해서 열 개도 훌쩍 넘긴 지금까지 틈틈이 물주고 잎을 닦고, 가지를 다듬고 애지중지 하다가도 몸이 많이 아프거나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물 한 모금 못주고 며칠씩 방치하고 거들 떠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화분 앞에 다가서면 죽기직전 까지 시들어 겨우 목숨만 부지해 있거나 이미 죽어있다.

 키우고 죽이기를 반복하며 어딘가로 마음을 쓰는 것이 사치로 느껴지는 순간이었지만 죽은 줄 알고 방치 했던 화분에서 꽃대가 올라오고 여리고 예쁜 새싹이 올라온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하고 위로 받으며 열심히 화초에게 마음을 쏟으며 나도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화초의 이름도 성도 관심이 없던 내가 식물의 이름도 알아가고, 꽃이 피면 보라색인지 노랑꽃인지 궁금하고, 아름다움과 그들의 향기로 기쁨을 느낀다. 관심이 있으니 마음이가고 마음이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올해 초부터 시장을 봐서 식사 준비를 남편이 도맡아한다.

암 진단을 받고나서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언뜻언뜻 억울한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평소 예쁜 그릇을 탐하는 나는 그동안 아껴두고 모아왔던 그릇이라는 그릇은 다 꺼낸다.  크리스탈 와인잔, 고상한 도자기,  싱그러워 보이는 파란 음료수 컵, 바라보기만 해도 넘 예쁜 과일,간식접시 등등. 딴에는 정서적 사치를 부려가며 혼자 폼을 재어 보면서 그릇그릇 마다 먹고 마시고 남겨진 잔해들이 어찌나 많은지 하루를 살고 나면 씽크대에 가득 쌓이는 설거지거리다.

 오늘아침 드디어 남편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늘어놓고 어지르고 치우지도 않는 나를 보고 어젯밤 분명 고동부인이 찾아와서 집안을 난장판 만들어 놓았다며 지난밤 쌓인 설거지를 해대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결혼생활 30여년에 15번의 이사를 해가며 알뜰살뜰 살아왔건만 그까짓 설거지 좀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 몹시 섭섭하다.  어쩌다 몹쓸 병에 걸려 수술하고, 5년 생존율이 48%밖에 안 된다는 슬픈 통계를 보며 사치 아닌 사치를 부려 봤건만 투정만 늘어가는 남편이 야속하기도 하고 한편 가엽기도하다.

  33년을 하루같이 우렁각시가 돼서 살아왔는데 이제 겨우 1년 남짓 살림하면서 날보고 고동부인 이라고 투정을 부리며 힘들어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도 내가 항암 6차 치료를 하는 동안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 하던 어느 신새벽 보강천 미루나무 숲으로 내손을 꼭 잡고 가더니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에 서투른 시 한편을 써서 나를 위한 글이라면서 읽어주던 남편.

‘죽지마라 잘 견뎌라 살아보자’ 울며불며 나를 위로 해주던 참 고마운 당신!

지난주에는 ‘막실라리아’ 화분을 들여왔다. 초콜릿 향 같기도 하고 헤이즐넛 커피 향도 나는 화분이 지금 우리 집안을 향기롭게 하고 있다.

 특히 나에게는 향기가 주는 효과가 큰 것 같다. 식물을 돌보며 식물들이 뿜어내는 향기와 자연의 냄새에 조급하고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오늘 내가 비록 우렁각시가 아닌 고동부인이 되었어도 아직 살아서 남편과 아침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으니 난 행복한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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