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미영 수필가

민미영 수필가

[동양일보]레비스트로스가 쓴 <슬픈열대>에 나오는 글이다.

나무뿌리나 거미 혹은 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회조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이럴진대 같은 현대문명 속에서도 조금 더 나은 환경에 사는 이들은 그보다 못한 시골의 무지한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긴다. 어쩌면 그 시골의 무지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르고 인간적이며 합리적이며 지혜로운데도 말이다. 현대의 서구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더 낫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것은 더 유동적이기 때문에 축적적일 뿐이다.

경기여고를 졸업했다는 올해 92세 된 어르신. 외모도 단아하고 말투와 표정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세련되어 있다. 말은 또박또박하며 차분했고,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조용조용하나 분명한 어조로 깔끔하게 말씀하신다. 여고 친구들은 다 친하지만, 더 친한 사람도 없고 딱 거기까지만 이라고 하시면서 당신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친구들도 똑같다고 하셨다.

자녀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을 나와 유명의사라는 말까지 하면서 자랑스러움은 넘치나 92세 된 어르신이 홀로 사시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얼굴에 심하게 멍이 들었다 하니, 자랑스러움과 정성 어린 보살핌은 함께 갈 수 없는 모양이다.

폐암 1기 때 발견하여 아주 약하게 받는 항암치료도 힘이 들어 중단되었다고 함에도 그분은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고 따로 혼자 사셨던 모양이다. 더구나 남편도 없이 자녀들과 다른 낯선 도시에서 혼자 사셨다고 한다. 남의 도움 받는 게 싫다며 당신은 자식이라도 신세 지는 게 싫다며 깔끔한 성격임을 자랑하신다.

삶이 롤러코스터처럼 부침이 심해도 팍팍한 인생이 되지만, 너무나 걱정 근심 없이 평탄한 삶을 살게 되면 여유롭고 평안함이 몸에 배어 따뜻하고 배려심이 있는 좋은 점도 있지만 대체로 남의 어려움에 공감하기 힘든 점도 있고 겸손함을 갖추기가 어렵다.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둔 엄마가 속 썩이는 자녀를 둔 엄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애들이 공부를 왜 안 한대요?”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겪지 못한 어려움은 타인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예전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어르신들 세대에서 여고를 나온 분들을 보면 대체로 조리 있게 말씀도 잘하시고, 사리 분별 정확하신 편이다. 다만 그게 어느 정도 선을 긋듯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라 항상 먼 느낌이다. 그런 분들에 비해 비록 학교는 다니지 못해 지식적으로 아는 건 좀 없어도 경험에서 나온 지혜가 있어 포근하고 따뜻하며 위로받는 느낌을 주는 어르신들이 있다. 배움은 비록 없지만 그 분들의 생각과 행동이 더 반듯하고 인간적이며 합리적이고 지혜롭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항상 하나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일정 거리에서 사람을 대하기에 불편함을 만들지도 않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기에 상처받을 일도 없는 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게 겉보기엔 우아하고 교양있는 듯 하나 외롭지 않을까? 이것도 교양과는 거리가 먼 나의 생각이다. 조금은 부족한 듯, 허당끼를 보이는 그리고 무뚝뚝하나 따뜻한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 훨씬 좋다. 쌀쌀맞은 듯하면서도 정이 있고, 자기가 손해를 보는 줄 알면서도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려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좋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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