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성 수필가

함무성 수필가

[동양일보] 홍조팝 꽃이 또 폈어.

지난 유월에도 분홍 꽃송이들을 무더기로 피워 올렸었지. 큰 소나무아래 둥그렇게 울타리처럼 심어놓았었는데, 첫 꽃이 핑크빛 솜사탕을 뭉텅뭉텅 떼어서 올려놓은 것 같았지. 그 위로 벌도 아닌 것들이, 풍뎅이도 아닌 것들이 진종일 붕붕거리며 난장을 벌리더라. 오호라.‘꽃무지’였구나.

며칠이 지나자 홍조팝은 꽃잎 하나 떨구지 않은 채 조용히 갈색으로 변했지. 꽃이 질 때 모가지를 뚝 떨어뜨리는 동백꽃하고는 영판 다르네. 자존심이 대단한 것 같아.

홍조팝 무더기를 단체로 뭉텅 허리춤부터 잘라내고 새 순을 받았었어. 조경사가 그렇게 해 보라고 했거든. 한 여름 태양빛과 가끔씩 내리는 소나기를 흠뻑 맞으며 쑥쑥 자라더니 웬 일이니, 팔월인 지금 또 꽃송이를 달았구나.

좁쌀 같은 꽃송이에 수술이 꽃 밖으로 삐죽이 나온걸 보니 마치 보송한 털이 덮인 것 같아. 영산홍, 개나리, 나리와 백합은 한번 폈다 지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홍조팝은 이 여름에 한 번 더 꽃을 주니 신기해.

정원을 꾸미기 시작한지 벌써 십년이 넘었어. 죽기 전에 정원을 갖는 건 내 마지막 로망이었거든. 기쁨으로 들뜬 채 스케치북에 나무를 배치할 조감도를 그리고, 바위를 놓을 자리도 정했었지.

소나무와 단풍나무의 크기를 고려하고 주목과 산사나무의 위치도 정한 후, 꽃을 볼 수 있는 병꽃나무와 칠자화, 미산딸 나무를 중간 중간 심었어. 잔디를 제외한 나무아래는 키 작은 비비추나 옥잠화로 덮었지. 서쪽 비탈에는 영산홍으로 가득 채우고, 뒤쪽 비탈에는 두릅나무와 죽단화를 심었어. 이제는 집 주변이 가득 차서 조용히 들어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꽃과 나무들 보고 있기 좋아.

가만있자. 내 생에 화사한 꽃을 피웠던 적이 언제였었나.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고,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청년기였지 아마.

그러나 뜻대로 무지개는 잡히지 않고, 늑대 같은 남자만나 -내 표현이 심했나?- 밥하고, 빨래하고, 애 기저귀 갈고, 제사 음식 만들다 세월 다 갔어. 공주 같던 백목련처럼 핀 적도 있었지. 그런데 백목련 꽃 지듯 한 순간에 흙 묻은 화장지 날리듯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잖니.

자식들은 제 짝 찾아 다 떠나고, 뭔 날이 되어야만 숙제하듯 얼굴 내미니, 반갑다고 내색하기도 자존심 상해. 이제 내 머리에 서리 내리고, 옛날 옷은 허리가 안 맞아서 못 입는데, 남편 이라고 별 수 있나. 우람하던 근육은 다 어디로 가고 검버섯이 솔솔 올라와. 정원이 풍성하면 무엇해. 집 안에는 시든 꽃 두 송이만 소파에 앉아있는 걸.

눈 시려서 책도 보기 싫고, 무릎 아파서 산에도 못가고, 이 아파서 갈비도 못 뜯어. 그래도 크게 걱정은 하지마. 개밥은 챙겨 줄 수 있고, 마당에 잡풀도 쉬엄쉬엄 뽑을 수는 있어.

근데 웬일이니. 홍조팝은 회춘했나. 한 여름에 두 번이나 꽃을 피울 수 있다니.

홍조팝 꽃술 위에 호랑꽃무지들 난장 벌리는 것처럼, 우리 정원으로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손녀 다 불러서 난장 한번 벌려 볼까.

며느리는 밥하고, 아들은 잔디 깎고, 딸 훔쳐간 미운 사위는 대청소를 시키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이쁜 딸은 엄마하고 둘이서만 테라스에 앉아 홍삼차나 마시면 어떨까. 아직 내 인생 끝이 멀었으니 홍조팝처럼 두 번째 꽃 좀 피워 볼까나.

기능성 속옷 맞춰 입어서 허리 좀 줄이고, 남편한테는 핑크색 남방도 사서 입히자. 나이 핑계대지 말고 주저할 것 없이 ‘새삶스러운’삶을 시작해 봐야쓰것다.

무뚝뚝한 남편 앞에 다소곳이 서서‘알 라 뷰~’하면 뭐라 할까.

또 그러겠지.‘이 양반이 버섯을 잘못 먹었나.’

홍조팝 꽃아! 너 따라 나도 핀다.‘알 라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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