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수필가

김정옥 수필가

[동양일보]판을 깔았다. 애초에 질펀하게 수다를 떨려고 작정한 만남이었다. 그러니 굳이 시간 들여 멀리 갈 이유가 없었다. 산모롱이를 돌아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한옥은 편한 친정집처럼 마음 자락을 풀어헤치기에 마침맞았다.

오락가락하던 장맛비가 멈췄다. 훗훗한 바람이 간간이 분다. 흔들의자 지붕 위에 늘어진 능소화도 기웃거리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우리들의 수다에 끼어들고 싶은가 보다. 다섯 명이 색깔은 다르지만 같은 잠옷을 입었다. 십 대 소녀들이 일명 ‘파자마 파티’라도 하는 양 마음이 달뜬다. 몸도 마음도 무장 해제한 듯 점점 느슨해지고 있었다.

오인오색(五人五色)이다. 다섯 여자가 나이와 모습과 품은 그릇이 각기 다르다. 가지각색의 수다가 점점 무르익더니 자정을 지나서도 그칠 줄 몰랐다. 두시가 넘어 한 명이 금방까지 하던 응대가 없는 걸 보니 먼저 곯아떨어진 듯하다. 마지막까지 말똥말똥한 막내가 풀어놓던 속엣말을 멈춘 시각이 새벽 네 시가 넘었다.

수다거리야 우리들이 살아온 이야기였다. 속에 담고 있었는데 아무에게 선뜻 펼쳐 놓지 못했던 이야기가 봉숭아 씨오쟁이 터뜨리듯 톡 터진다. Y가 남편이 희소 암 선고받고 여러 차례 항암 주사에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까지 하면서 애가 닳아 초주검이 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녀는 그 시간으로 돌아간 듯 눈물이 글썽글썽하더니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남편을 잃을까 봐 조바심 내며 온갖 정성을 들인 그녀 얘기를 들으며 마치 내가 그녀인 듯 가슴이 저리다.

남편이나 자식이나 아픈 이야기가 제일 절절하다. 놀람과 안타까움에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그녀 자식이 내 자식이고 내 남편이기 때문이다. 며느리에게 서운했던 일이 한두 차례 나오는데 아픈 이야기에 견주면 섭섭했던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른이 한옆으로 마음만 돌려먹으면 될 터이다.

열심히 듣기만 하다가 기어이 나도 한 자락을 풀었다. 최근에 한 모임에서 나 혼자 빠져나온 이야기를 했다. 모두 현직에 있는데 나만 은퇴한 지 10년이 된 구성원이었다. 그곳을 벗어난 시간만큼 괴리감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하는 얘기에 선뜻 끼어들지 못하고 물에 기름 돌듯 겉돌았다. 결국 마음이 편편치 않아 빠져나오고 말았다. 내 이야기에 공감하며 맞장구를 쳐주는 그녀들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L이 ‘똥꼬’가 아파 배설하느라 고생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너도나도 수술한 경험담이 실타래 풀리듯 연이어 술술 나온다. 숨김이 없으니 못할 이야기가 없다. 그녀의 넉살이 이어진다. “무슨 일이 건 마지막 관문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소.”라는 얘기가 철학으로 들린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다. 사는 일에 정답이 없고 자식의 일에 더더욱 왕도가 없지 않은가.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치면 당황하기 마련이지만 현실의 파고가 높으면 두렵더라도 물결을 타고 넘으며 헤쳐 나가야 하리라.

우리들의 수다는 꼭 무슨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고 치유를 받고자 하는 속내였다. 말을 쏟아냄으로써 공감과 응원의 메시지를 받으려는 심사일지도 모르겠다.

한여름 밤 우리들의 수다가 1막을 내리고 깔았던 판을 접었다. 뜨락에 핀 주홍빛 참나리가 고개 숙여 배웅한다. 낮게 드리웠던 구름이 걷히고 한옥 마당에 한여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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