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천도 통해 백제의 새로운 터전 잡아

[동양일보 유환권 기자]공주시는 백제 22대 왕으로 웅진 천도를 단행하며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잡은 인물인 문주왕(사진)을 9월의 역사 인물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문주왕의 이름은 모도(牟都) 혹은 여도(餘都)라고 하며, 백제 제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이자 곤지(昆支)의 형이며, 23대 왕인 삼근왕(三斤王)의 아버지다.

475년 9월, 문주왕은 고구려 장수왕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 한성(漢城)을 포위하자 신라의 구원병을 요청하라는 개로왕의 명령에 따라 신라로 향했지만 문주왕이 신라의 구원병과 함께 돌아왔을 때 한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개로왕도 전사한 후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개로왕에 이어 백제 22대 왕으로 즉위한 문주왕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의 천도를 결정했다.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475년(문주왕 원년)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은 웅진성 안의 궁궐 및 여러 시설물을 갖추어 나가는 일에 착수했다.

더불어 개로왕 직계 왕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왕위계승 상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동생인 곤지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임명하고 맏아들인 삼근을 태자로 삼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려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비록 고구려의 방해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유송(劉宋)에 사신 파견을 시도했으며 탐라국으로부터 공물을 받는 등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강 유역의 상실과 귀족들의 내분으로 인해 백제의 국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의 문주왕의 대내외적 정책 추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오른 해구(解仇)는 477년 곤지에 이어 문주왕까지 시해한 후 13세에 불과한 삼근왕을 옹립했다.

비록 즉위 3년 만에 해구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국난 극복을 위해 대내외적으로 추진한 문주왕의 정책, 특히 웅진 천도를 통해 백제는 국력 회복을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는 521년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언으로 대표되는 백제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다.

조병철 문화재과장은 “백제 제22대 왕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웅진 천도를 단행하여 백제의 새로운 터전을 잡은 문주왕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9월의 역사 인물로 선정했다. 9월 중 시민을 대상으로 문주왕 관련 프로그램을 개최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공주 유환권 기자 youyou9999@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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