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현 시인

박하현 시인

[동양일보]남극의 빙하가 사라지고 그 여파로 기승을 부린 가뭄과 폭염, 이어진 폭우로 집이 잠겨 인명 피해를 입은 상처투성이 여름이 물러가고 새 계절이 왔다. 아직 전염병이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여행을 떠나고 친지들과 함께 식사를 해도 될 만큼 자유로워져 가을을 맞는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주어지는 축복, 탐스럽게 익어가는 대추 한 알이 고통스러웠던 비바람을 이겨냈다며 붉게 웃는 것 같다. 때마침 숨 쉴 수 있어서, 곁에 누군가 있어서 감사하다는 가사의 노래가 들려온다. 그래,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에 방점을 둔 것은 보육원 출신 청년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보가 잊히지 않은 까닭이다.

이 지점에서 동화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바로 작년 ‘올해의 책’에 선정된 “긴긴밤‘이 그것이다. 5,6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고 좋은 책으로 꼽았고 혼자 산책을 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가슴 뻐근한 온기로 문득문득 찾아와 울먹이게 하곤 했던 책이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어린 펭귄, 이 둘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향해 길을 나선다. 동물원 코끼리들 틈에서 살다 한때 자연으로 돌아가 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노든은 인간의 사냥 대상이 되어 그토록 아끼던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되었다. 천진무구한 어린 펭귄은 동물원 어른 펭귄들의 보살핌 속에 자라다 사고로 혼자가 되었다. 덩치 큰 코뿔소는 발아래 작은 펭귄의 보호자가 된다. 둘은 한 몸처럼 움직이며 위험이 도사린 배고픈 세상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외로움과 결핍은 단단한 우정이 된다. 머나먼 힘든 길을 견디며 서로를 지켜주며, 동행과 긍정의 힘으로 긴긴밤을 통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얼마나 알 수 없는 세상인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막막하고 두렵다. 그 길이 혼자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작고 여린 것들의 눈은 너무 맑아서 도무지 무서움이라곤 모를 것 같아 보여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큰 것들의 말엔 확신이 가득하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지만 그들의 마음까지 그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늙은 노든은 포기할 수 없는 원통함과 복수의 마음을 접고 어린 펭귄이 살아가야 할 바다를 삶의 목적지로 삼았다. 자신을 포기한 큰 것의 작은 것을 위한 배려와 책임은 더할 수 없는 온기와 감동으로 다가온다.

갇혀 사는 형국이었던 코로나 시국을 지나면서 사람들의 시야가 안으로 안으로 좁아졌던 것 같다. 내 가족, 내 건강이 우선 되어야 했던 까닭이리라. 그러는 사이 혼자서 가기엔 너무도 아득했던 길 위에서 생을 놓아버린 청년들, 그들의 바다까지 안내하지 못한 큰 것의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아프게 고백한다. 가르치려 하기 전, 맑은 눈에 스며드는 먹구름을 알아채주는, 오만 엉뚱한 생각까지 공감해주는 ‘안전한 어른’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지켜냈으면 좋겠다. 이 가을 높푸른 하늘을 보며 밖으로 밖으로 시야를 넓히는 우리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코뿔소와 펭귄처럼 연결된 관계가 더 많아져 어린 펭귄들 곁에서 그들이 통과해야 할 긴긴밤을 지켜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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