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송보영 수필가

[동양일보]초록에 지쳐 단풍 든다고 했던가. 만산홍엽에 눈이 시리다. 온 힘을 다해 봄여름을 살아내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쇠락해가는 저들 모습이 겸허하다.

바람이 소쇄하다. 청량한 바람이 눅눅했던 몸과 마음을 가슬가슬 말려 준다. 순해진 가슴 한 자락에 가을이 안겨 주는 쓸쓸함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쓸쓸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이 선해진다는 것은 아닐까. 쓸쓸함이 자리하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소원했던 이들에게 손 내밀어야겠다 싶고 문득 먼 곳에 있는 이들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프게 하는 이들까지도 사랑해야겠다 싶어지기도 하는 걸 보면 쓸쓸하다는 것은 선하다는 것이고 그 속성에는 아름다움이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올 한 해와도 결별을 고해야 하는 날들이 머지않았다. 연초에 한 해를 시작하면서 나와 우리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의 모두가 무탈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삶이 되길 바라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지속함으로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돌이켜보면 올해도 많은 이들과의 조우가 있었다.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온 이들, 삶의 길목에서 우연히 스쳐 간 인연들. 나름의 삶을 살아가느라 분주하면서도 무탈해서 고마운 가족들. 먼 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어 다행인 지인들. 지난여름 끝자락 길손들의 쉼터에서 우연히 만나 차 한 잔 나누었을 뿐인데 오랜 지기나 된 것처럼 속내를 털어놓던 쉼터의 주인장. 단팥빵 두 개밖에 사지 않았는데도 한 개를 덤으로 얹어준 ‘10월의 단팥빵’ 가게주인 청년 사업가. 퇴근길 붐비는 전철 안에서, 하루의 일과를 살아내느라 지쳤을 텐데도 흰 서리가 듬뿍 내린 내 머리 때문인가. 서슴없이 자리를 내어주어 민망하게 하던 젊은이. 그들이 있어 내 삶의 들녘은 적막하지 않았다.

결실의 계절이기도 사색의 계절이기도 별리(別離)의 계절이기도 한 이 가을 삶의 주변에서 나와 조우했던 이들 모두 평안했으면 좋겠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쉼터에 들르게 되면 주인장으로부터 지인에게 받은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다는, 10월의 단팥빵 가게가 번창했다는, 자리를 내어준 젊은이나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이들의 실업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그들과 나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농익은 낙엽들이 내려앉는다. 저들을 보며 생각한다. 작은 나뭇잎 하나도 겨우내 메말랐던 수피를 뚫고 돋아나 성장해 낙엽이 되기까지 견뎌낸 날 들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터. 따사로운 햇살의 속삭임이 있었는가 하면 드센 비바람도 있었을 것이고, 여린 잎을 갉아 먹는 해충의 침입을 견뎌야 하는 모진 날들도 있었을 게다. 이 가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겸허히 내려앉아 생을 마감하는 저들 모습은 질곡의 날들을 견뎌내며 소임을 다한 뒤 주어진 아름다운 훈장이다.

만추의 길목에서 우리네 삶을 생각한다. 산다는 게 어디 거저 되는 일이던가. 달고 쓰고 맵고 짠 모든 과정을 통한 담금질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선함과 그리움이 녹아 있는, 쓸쓸해서 아름다운 이 가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떨어져 내리는 한 잎의 낙엽에서 인생의 무게를 느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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