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영 수필가

나대영 수필가

[동양일보]어쩌다 젊은 날의 내 일기장을 펼쳐 보노라면 세월의 파편들이 널려 있다. 사실, 세월은 빛과 같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아직 세월이 아니며 바로 어둠 자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어둠 속의 세월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입으로는 세상은 바다와 같다며 인생을 고해라고 엄살을 떨면서도 마치 강아지가 목줄에 매여 끌려가듯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은 차라리 처절한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을 빛살에 비치는 그림자가 그러하듯 작은 미풍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은 너른 바다에 떠 있는 한 점 부표와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야 모르지만 우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서 끝없이 끌려 다니는 세월의 일부라면 너무나도 가슴 아픈 표현이 될 것만 같다.

그렇다. 세월은 우리들의 슬프고도 암울했던 기억임에 분명하다. 그 기억이 없는 세월은 이미 세월이 아니다. 우리가 암흑 속의 미래를 세 치의 혀로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 보아도 아직은 세월이라 불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에는 반드시 세월의 지문이 남아 있고 또 그 지문은 결코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조각난 단편들 뿐이다.

더구나 그 기억들은 대부분 아픈 기억들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했는지에 대해선 대체로 기억이 없다.

물론 그 어떤 타인의 상처보다도 자신이 입은 상처가 가장 아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된지 오래되었고 또 타인의 불행이 자신에겐 행복이라거나 혹은 타인의 행복함으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것은 오랜 세월 속에서 가설로서도 입증된 사실이라면 너무나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민망스럽지만 우리 인생은 결코 세월의 중심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늘 그랬고 앞으로 그럴 것이지만 항상 세월 끝에 서 있었다.

그 분명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굳이 외면하며 살아 온 것은 생존에 대한 끝없는 욕망 때문이었다. 본시 살아 존재하는 모든 자연물은 생존이야말로 기본적인 요건이 아니겠는가?

만약 우리가 죽었다면 이 세월의 이야기도 끝나는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세월이란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다면 세월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은 진행 중이며 장막이 내리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설령 그 세월이란 각본에서 ‘행인 1’로 나오거나 ‘행인 2’로 나오더라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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