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수필가

이은희 수필가
이은희 수필가

[동양일보]새벽길을 나서는데 가을비가 추적거린다. ‘가을’을 말하면, 누구라도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심정이리라. 울긋불긋한 단풍을 떠올리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리고, 백지에 무엇인가 적고 싶어 안달이다. 누구보다 먼저 가을을 만나고 싶어 산수 좋은 사찰을 찾는다. 하지만, 빗길에 우리가 가고 싶었던 드높은 산정은 미루고, 산청의 호젓한 산사, 대원사로 든다.

단아하고 정갈하게 가꾼 비구니 사찰이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아기자기한 멋이 깃든 곳이다. ‘산청’이란 지명처럼 청정한 계곡 물소리로 귀를 씻으며 산길을 오른다. 고목의 나뭇잎으로 하늘을 에워싼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법당에 다다른다. 대웅전 앞 전경이 희뿌염 안개가 흐르고 빗물로 씻긴 전각들의 기와지붕이 말끔하다. 기왓장으로 세운 앙증맞은 담에는 다육식물이 오종종하다. 산왕각 아래 장독대도 역시 비구니 스님들의 살뜰한 마음을 보는 듯하다.

산신각 길목에 감잎이 떨어져 있다. 감성 깊은 지인은 주홍빛으로 물든 감잎 한 장을 얼른 손에 쥐어 보여준다. 올해의 첫 단풍인 감잎을 사진에 담으며 정녕 ‘가을’임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산청의 가을은 감나무가 먼저 알리고 있다. 단풍이 든 감나무는 잠시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는다. 먹구름이 잔뜩 퍼진 공중에 주홍빛 감이 감꽃으로 다문다문 물들고, 발치에는 감나무 잎이 떨어져 붉은 꽃처럼 피어난다. 가을비에 젖은 감잎이 꽃처럼 아름다운 날이다.

배롱나무 옆 나무문에 다다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소박한 쪽문이다. 키가 큰 내가 작은 문을 지나려면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야만 머리가 부딪지 않고 들어가리라. 아마도 귀중한 분이 기다린다는 표식의 좁은 문이 아니랴. 세속에서 꼿꼿이 세우던 등허리를 숙여야만 하리라.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보고 예를 갖추고 문턱을 넘으라는 소리만 같다.

작은 문에 들어 층계를 오르니 단풍 든 나무처럼 우뚝 선 붉은 돌탑이 보인다.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이다. 석탑은 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자 세운 탑이다. 임진왜란에 파괴되었다가 복원하다 58과 사리와 사리함이 발견되었단다. 받침돌 면석에는 팔부중상이, 모서리에는 사람 모습의 사천왕상 조각이 독특하다. 퉁방울만 한 눈동자와 길쭉한 두 귀, 매부리코와 앙다문 입. 동자석처럼 새긴 사천왕상이다. 대부분 일주문 뒤에 사천왕상이 배치되는데, 이곳은 석탑에 수호석으로 자리하여 흥미롭다.

돌탑을 바라보고 있으니 들뜬 마음이 차츰 누그러진다. 탑 앞에서 합장하고 먼저 지구상에 전쟁이 멈추길 염원한다. 더불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길인 분노나 원망, 덧없는 욕망이 출렁이지 않기를. 부디 그대도 이 가을에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나날이길 원하며 작은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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