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 수필가

김정옥 수필가

[동양일보]턱에 걸려 큰대자로 뻗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오지게 부딪힌 무릎이 깨질 듯 아팠다. 구겨진 종잇장 얼굴을 하고 엉거주춤 일어서서 바짓자락을 탁탁 털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엘리베이터를 눈자리가 나도록 쏘아보았다. ‘하필 오늘따라 다 올라오기도 전에 멈출 게 뭐람.’

예전에는 집안 곳곳에 턱이 있었다.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이 한 자나 되어 발을 높이 쳐들었다. 어린아이는 감히 넘어올 수 없는 높은 문지방 앞에서 무연히 밖을 내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면서 집의 구조도 바뀌어 문턱이 얕아지거나 아예 없어져 한결 드나들기 편해졌다. 사물의 경계는 얕아져 편리해졌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 턱은 더 높아졌으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장벽 넘기가 더 힘들다. 남편이 걸핏하면 2절까지 하는 말과 속없이 내뱉은 말이 마음의 턱을 넘지 못하고 가시가 되어 번번이 목에 걸린다. 50년 가까이 산 부부 사이도 그럴진대 남과의 장벽은 여북하랴. 글 턱은 내 맘대로 깎기라도 하련만 말은 날아간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히니 빼기가 더 난감하다.

턱은 해가 갈수록 높아진다. 중고등학교 턱이 허리춤에 있다면 대학교 문턱은 이마께로 올라간다. 그래도 취업 문턱에 비하면 약과지 싶다. 청년들은 그들의 꿈을 펼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죽을 똥을 싼다. 어찌어찌 넘었다손 치더라도 생의 통과의례인 결혼과 출산 문턱이 가로막는다. 오죽 높으면 지레 포기하는 사람도 많을까. 간신히 넘었다싶으면 또 하나가 기다리고 있으니 턱을 넘고 넘으면서 살아가는 게 숙명인가 보다.

하늘 한 번 쳐다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던 때가 있었다. 내 앞이 지질펀펀하게 길이 열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턱에 걸려 넘어지면 애먼 턱을 원망했다. 넘어져 봐야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할 것인데 그때는 그걸 모르고 속을 끓였다.

몇 년 전 한라산 등반을 했다. 백록담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앞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온몸으로 바람을 안고 휘청거리며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각고 끝에 백록담을 만난 일은 또 하나의 완성이었다. 이렇듯 삶도 뭔가를 이루기 위하여 피할 수 없는 턱을 안고 가야 할 때가 있다. 무망중에 닥친 턱이라 할지라도 그저 내 업業이려니 하고 묵묵히 넘으리라.

아이가 수없이 넘어지면서 무릎이 깨지고 나서야 똑바로 걷는 것처럼 넘어진 만큼 내 삶도 성숙해질 것이다. 병충해를 이기고 비바람 치는 몇 고비를 넘어야 야금야금 몸피를 부풀리며 올찬 열매를 맺을 수 있지 않겠는가. 생의 돌부리에 접질려 주저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턱을 넘을 때까지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내닫던 속도를 한 박자 늦춘다. 숨을 고르듯 방지 턱을 넘으며 좌우를 살핀다. 들판에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나울나울하고, 비거스렁이로 불어오는 선들선들한 바람이 자그럽다. 가을이 문턱을 넘었나 보다. 나는 오늘 또 하나의 턱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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