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일본 끌려가 고급백자 성공... 현지서 ‘신’적 존재 추앙
현재까지 공주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관련 근거 적어 논란 진행중
일본 도조비의 ‘충청도 공주’ 출신 비문도 입증자료 부족 '신뢰 못줘'

이삼평이 정착해 도자기를 구운 일본 아리타의 '도자사' 자료. 이삼평 고향이 '충청도 금강'이라는 실제 자료를 찾기 어렵고, 그 설정 과정도 입증이 안된다는 내용이다.
이삼평이 정착해 도자기를 구운 일본 아리타의 '도자사' 자료. 이삼평 고향이 '충청도 금강'이라는 실제 자료를 찾기 어렵고, 그 설정 과정도 입증이 안된다는 내용이다.

이삼평, 조선 시대 도공(陶工)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사가현() 아리타에서 고급 백자 제조를 성공시켜 도조(陶祖)로 숭앙 받는 인물.

일부 기록을 근거로 공주 출신이라 알려졌고, 우수 도자 기술을 전파해 줬다는 점 때문에 공주 시민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조선인이다.

한국(공주시 반포면)과 일본 양국에 각각 그를 추념하는 기념비와 도조비가 세워져 있고, 공주시는 202010월 그를 이달의 역사인물로 선정해 뜻을 기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공주시의 이삼평 도자문화예술단지조성 추진과 관련해 그의 출신지에 대한 진위 여부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의 고향이 공주가 아닐수도 있다는 여러 논란, 이삼평은 과연 공주 사람일까.

유영문 계룡산도예촌 철화분청사기 연구회장은 30이삼평의 고향이 공주라는 역사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출신 지역은 물론 조선에서의 거주지 행적으로 밝혀진 것 역시 사실상 거의 없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삼평의 공주 사람주장 근거는 크게 두가지다.

1927년 일제가 발간한 학봉리 요지 발굴조사 결과 보고서가 그 중 하나다.

당시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일부 전문가들이 학봉리 도편(陶片)과 아리타의 초기 도편이 같다고 주장하며 이삼평의 공주 출신 추정에 큰 힘을 싣는다.

그러나 계룡산도예촌 작가들은 아리타 자기와 계룡산의 철화분청이 재료·제조과정을 포함한 기술적 부분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1917년 아리타에 세워진 이삼평 도조비의 비문 내용이 그의 공주 출신설에 두 번째 역할을 한다.

비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일본의 무벌 세력 '타쿠가(多久家)‘의 문서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비문에 따르면 이삼평은 조선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정리 돼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지역명 충청도와 한자어 금강(金江)’이 쟁점이다.

이삼평의 일본명은 카나가에 산베에(江 三兵衛)고 삼평이라는 이름은 산베에(三兵衛)를 한국어 발음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비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삼평의 씨명이자 출신지를 나타내는 카나가에()가 금강(金江)으로 왜곡됐고, 동시에 충청도까지 이어 붙으면서 그의 본향이 충남 공주로 굳어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비문을 통해 처음으로 뜬금없이 등장하는 충청도는 도조비 제작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당시 현지 일본인 나카지마(中島浩氣)라는 자의 주장을 통해 부여됐던 것으로 알려져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

금강(金江) 역시 오늘의 실제 금강(錦江)과 달라 이삼평은 충청도가 아닌, 금강(金江) 지명의 다른 지역 출신일 수 있다는 의문이 설득력을 얻는다.

199010월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 박정자에 한국의 이삼평 기념비가 세워진 과정도 논란이다.

기념비 건립 직전인 1988년 아리타에서 한국에 이삼평의 출신지 조사를 의뢰했는데, 당시 부실조사 또는 일본의 입맛에 맞추어 공주를 그의 고향으로 추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일부 지적이 그것이다.

일본내 도조비가 이삼평 사망(1656) 당시를 뛰어넘어 근대(1917)에 만들어졌다는 점도 비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유 회장은 경술국치 이후에 작성된 일본 자료만 믿고 이삼평의 고향이 공주라고 하기엔 큰 무리가 따른다관련분야 전문가들이 일본과 국내에 있는 고서 및 사료를 균형있게 분석함은 물론, 도자 기법과 기술을 분석해 더욱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공주 유환권 기자 youyou9999@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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