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곤 시인

이재곤 시인

[동양일보]어릴 때 살던 집 뒤뜰 양지바른 곳 한편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던 장독대.

그 곳은 수십 년간 숨겨진 어머니의 속마음이 모조리 겹겹의 비밀로 쌓여 있는 곳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달 밝은 보름 날 늦은 밤, 장독위에 물 한 사발, 촛불하나 외로이 켜 놓고 무엇인가 혼잣말로 중얼중얼 기도를 했는데 아무도 알 수 없는 엄마의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은 그 비밀은 오로지 장독들만 알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지켜온 집과 함께 오롯이 가족들의 건강과 맛있는 식사를 책임져야하는 양념의 보고인 장독은 엄마의 생명만큼이나 중요했으리라.

아버지가 농사지을 때 한 몫 톡톡히 거들고 농한기에는 송아지까지 낳아주는 큰 소를 마치 자식인양 중하게 여기는 것과 견주어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항아리가 모여 있었고 그 항아리들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양념이며 반찬으로 쓸 수 있는 각 종류의 장들이 담겨있었다. 오죽했으면 옛

말에 장맛이 그 집 음식 맛을 좌우한다고 했겠는가.

그러니까 간장이라도 오래 묵은 것부터 붉은 고추와 숯이 띄워져 있는 갓 담근 간장이 있고, 된장이나 고추장도 다 연식과 용도를 달리한 항아리들이었다.

장항아리의 으뜸은 단연코 장독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크기가 제일 큰 간장독이었다. 그 곳은 늘 정한수와 촛불을 켜 놓는 자리다.

아마도 촛불하나 정한수 한 사발은 어머니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과 세 살 터울로 고만고만한 여덟 남매가 한 집에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 말 못할 고민이 어머니를 시시때때로 압박하고 힘들게 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괴롭다. 하루세끼 끼니야 내 땅에 농사지은 곡식으로 자급자족했으니 해결되었다. 하지만 어디 밥만 먹고 살 수 있는가. 자질구레한 모든 가정사가 어머니에게 집중되었으니 그 고충은 굉장했을 테지만 워낙에 입이 무거웠던 어머니는 어디대고 함부로 속내를 털어 놓지도 못했던 터라 오로지 보름 날밤 장독과대의 독백이 마음을 다스리는 유일함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장독은 단순하게 가족의 먹거리 보관 역할이전에 가족 모두의 일상에 따른 안녕을 비는 어머니 마음과 정성이 숨어 있었다.

그랬던 장독이 있던 장독대가 지역개발로 없어지게 되었고, 어머니 마음의 안식처가 사라졌다. 조그만 항아리 몇 개만 아파트 베란다로 옮기며 이사하던 날 허전했을 어머니 마음을 생각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찬바람 불어오는 이맘때는 어머니의 기일이 있는 때이고 보니 너무도 간절하게 그리운 어머니 표 묵은 장맛과 함께 된장에 박아둔 무장아찌 맛이 많이 생각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인심이 각박하다 하지만 어머니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고충을 받아준 장독대에 의지하며 오로지 가족사랑 하나로 한결같은 헌신적이던 어머니의 실천을 통한 가르침은 영원한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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