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섭 청주시 문화재과장

김규섭 청주시 문화재과장, 수필가

[동양일보]두려움과 슬픔, 고통과 번뇌를 벗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따사로운 햇살이 두꺼운 옷을 벗게 하듯, 높은 계곡의 모난 돌을 둥글게 만드는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바람이다.

맑고 푸른 숲의 소리가 청량하게 울리는 곳. 정하동 야트막한 바위산 자락에는 우리의 모난 마음도 자비롭게 어루만져 주겠다고 길 위로 나온 부처가 있다. 순한 이목구비에 균형 잡힌 몸매, 네모진 얼굴에 그윽한 미소, 마모되고 희미해진 조각 속에서도 오히려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누가 찾았을까, 이토록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무심천을 건너온 한 줄기 바람도 조용히 날개를 접고 연꽃대좌에 앉아계신 비로자나 부처님께 경배를 올린다.

천년의 역사는 바위를 쪼아서라도 고통과 번뇌를 떨치고 염원을 이루기 위해 불법(佛法)에 기대려 했던 흔적들을 남겨놓았다. 거대한 돌을 쪼아 길 위에 불상을 세운 고려인들의 염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가정의 평안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했을까. 부처님의 가피를 받기 위해 바위산이 넘치도록 찾아왔던 사람들. 불전(佛前)을 밝히던 작은 촛불 하나에도 누군가의 간절함이 담겨있었으리라.

단단한 바위벽에 그림처럼 새겨진 부처의 모습. 한참을 바라보니 살아 있는 부처를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저렇게 큰 돌덩이에 부처를 조각한 그때의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돌을 깨고, 어떤 얼굴을 그리고 싶었을까. 단아함 속에 새겨진 섬세함. 천년 전 바위벽을 타고 정을 쪼면서도 속세의 기운 밀려들까 불심공덕 수없이 되뇌던 석공의 시린 손목이 눈에 선하다.

정하동 마애불의 수인은 오른손이 왼손을 감싸 잡은 지권인(智拳印)이다. 오른손은 부처와 진리의 세계를, 왼손은 중생과 사바세계를 의미한다고 하니 마애불이 지권인을 하고 계신 것은 부처와 중생이 깨달음으로 하나가 된다는 가르침 이리라. 어쩌다 속세의 못된 손 탔는지 눈은 움푹 파여있고 코는 한 켠 떨어져 나갔어도 바위산을 껴안은 무심천의 넉넉함처럼 부처님의 상호(相好)는 더없이 후덕하다. 불교에 문외한인 메마른 가슴에도 고요하게 밀려오는 울림이 있다.

외진 산 끝자락에 외롭게 앉아계신 비로자나 부처님. 바라고 구하는 세상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유난히 큰 두 귀는 천년세월 길 위의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부처님의 미소와 마주한 사람들은 지치고 고단한 삶, 세월의 풍상 속에 문드러진 마음을 부처님께 털어놓고 태연무심(泰然無心) 빈 마음 되어 돌아가지 않았을까. 시대를 뛰어넘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작품. 진흙 속에 피어난 돌 연꽃은 천년에 피어있다.

미호강과 무심천이 만나 이룬 풍요로운 땅, 정북동토성의 후예들이 모여 사는 곳. 삼국에서 후삼국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내내 격전지였다. 그러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위로가 필요했을까. 전쟁과 수난의 역사를 보내는 동안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봤을 정하동 마애불. 무지렁이 민초(民草)들은 이 길을 지나며 인간사 부질없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바위틈 어딘가에 뿌리 내린 저 여린 나무들도 부처님의 가피 속에 살아가는 것이겠지.

오늘도 염원을 가진 이들에게 눈맞춤을 해주는 부처. 법당 안에 위엄있는 불상보다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부처. 벽 없이 바라볼 수 있어 마음이 푸근하고, 자꾸만 바라보면 어느새 위로를 받게 되는 부처. 해 질 무렵 마애불 앞에 서면 마음이 더욱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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