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환 수필가

양미환 수필가

[동양일보]최근 관람한 영화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첫사랑을 찾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달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 남학생은 아내의 마음 깊은 곳을 긴 세월 전세 내어 살고 있다. 아내는 현실을 바쁘게 살아 내면서 남편에게 상처를 받거나 삶에 지칠 때 첫사랑을 떠올리며 메마른 가슴에 습기를 채우고 또 다시 현실을 살아간다. 아내는 그 시절이 자신이 사랑받던 가장 빛나던 순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 선고되자 아내는 자신이 가장 빛나던, 그 아름다운 순간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첫사랑 남학생에게도 자신이 순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음을 아내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영화는 남편과 함께 아내의 그 순수한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뮤지컬로 담았다.

우여곡절 끝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찾은 아내의 첫사랑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또 알게 된 진실은 남학생의 첫사랑 상대는 아내가 아니었다. 남학생의 첫사랑 상대는 놀랍게도 아내의 친구였다. 서로 같은 마음이었다고 믿어 마음 깊은 곳을 내어 준 긴 세월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믿고 있던 진실은 깨어져 과거로 남고 아내는 과거를 넘어 자신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에 함께한 무뚝뚝한 현실의 남편에게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고 그 남편 품에 생을 마감한다.

남학생에게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증거들 앞에 아내의 그 허무함이 스크린을 넘어 나에게도 진하게 전해졌다. 그토록 긴 세월 가슴에 담아 두었고 생의 마지막에 간절하게 그리워 보고 싶었던 상대는 다른 사람을 아내와 똑같은 마음으로 첫사랑이라 부르며 그리워하다 생을 다했다. 영화의 핵심은 이 부분이 아니다.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다.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많다. 영화의 이 부분을 보며 내가 믿고 있는 인간의 마음들은, 또 내 과거는 얼마나 진실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내 첫사랑은 진실일까? 그도 나를 나만큼 자신의 마음에 담고 살아갈까? 영화처럼 나만의 소중한 추억이며 나만의 착각으로 긴 세월 살고 있지는 않은지 깊은 의심이 든다. 그러나 나만의 착각이어도 괜찮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고 가벼운 마음이 된다.

강요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각자의 생각과 느낌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셀 수 없이 무한대의 색깔이 풀어져 아름다운 인생을 그릴 수 있다. 서로가 첫사랑일 확률은 높다. 그러나 영화처럼 아닐 수 있는 확률도 있다. 그렇다고 당신에게 내가 첫사랑을 느꼈으니 당신도 나를 첫사랑으로 느끼라는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상대의 친절을 내가 사랑으로 착각하고 긴 세월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은 타인이 컨트롤할 수 없고, 컨트롤해서도 안 된다.

나만의 착각이어도 괜찮다. 나만의 첫사랑이어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 착각의 힘으로 긴 세월, 또 평생을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 받고 현실을 버텼다면 그 착각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 나만의 첫사랑이어도 차가운 현실에 온기를 더했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첫사랑이다. 잘못된 역사처럼 바로잡아 정정해서 굳이 아파할 필요가 없는 과거다. 고단한 현실에 잠시 과거로 돌아가 위로 받고 또 현실을 살아 갈 수 있는 나만의 세계를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방전된 삶의 배터리를 언제든 충전시켜주는 추억을 혼란으로 그 수명을 스스로 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첫사랑이면 첫사랑이다. 상대의 생각까지 헤아려 그 아름다움을 먹칠하지 않기로 한다. 착각은 자유다. 그 자유가 진실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