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금철 수필가

신금철 수필가

[동양일보] 어제의 햇살이 아닙니다. 매일 어김없이 세상을 밝히는 햇귀이지만 오늘 아침엔 더 붉고 힘차 보입니다. 용맹을 떨치던 호랑이가 숲속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몸을 감추고, 귀를 쫑긋한 검은 토끼가 깡총 아침을 열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토끼의 세상입니다. 토끼처럼 우리의 삶을 지혜로 풀어내 모두가 행복한 희망의 해를 그려봅니다.

“행복이 무어라 생각하세요?” 신부님의 질문에 무언의 대답으로 혼자 마음 속에 답을 씁니다. ‘든든한 남편, 건강한 자식들, 잔병치레를 자주 하지만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먹고 사는 일에 크게 걱정 없는 게 행복입니다.’ 자신있게 정답을 써놓고 백 점을 주시겠지, 스스로 만족한 미소를 흘립니다.

“행복이란 나누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복을 혼자서만 누리기 위해 잔뜩 붇들고 있으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아니겠지요.”

오답을 써서 엑스표(X)를 받은 답지를 슬그머니 거둬들이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쌉니다. 매년 새해의 다짐으로 끝자리에 앉혔던 ‘나눔과 봉사’란 단어가 나를 향해 원망의 눈길을 보냅니다.

지난해 다짐했던 약속들을 공수표로 날린 때문일까요? 새해 첫날, 미사시간에 신부님의 나지막한 강의는 큰 울림으로 진동을 이르킵니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나에게서 떨쳐내지 못했던 욕심들이 회오리 바람에 안깐 힘으로 버팁니다.

“연말에 어떤 할머니가 나를 찾아와 용돈을 모아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달라고 돈봉투를 주고 가셨습니다. 그 돈으로 생계가 어려운 세 명의 독거 노인들에게 잘 전달하였습니다.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던 할머니 덕분에 도움을 받은 분들이 좀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박수가 쏟아집니다. 감동의 물결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 입버릇처럼 봉사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달콤한 말을 늘어놓던 내게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되니라.’ 라는 성경 말씀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라는 군자의명언이 화살처럼 날아듭니다. 내 시선이 방향을 잃고 흔들립니다. 몇몇 교우들의 눈도 아래를 향하는 듯합니다. 눈을 감고 사죄를 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당신이 주신 행복이 내 것인줄만 알고 움켜쥐고 나눌 줄 몰랐습니다.’ 찐득찐득 녹아 흘러내린 엿가락처럼 늘어붙어 나를 괴롭히던 욕심의 잔해들이 투덜거리며 조금씩 녹아내립니다.

“ 하느님은 너그러우신 분이니 반성하는 사람에겐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새해엔 내가 가진 복을 이웃과 나누고 봉사하는 공동체가 함께 행복하시길 기도합시다.”

신부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고 새해 다짐을 단단히 합니다.

살아오면서 오답을 정답으로 착각하고 거리낌 없이 지나친 일이 어찌 이번 뿐이겠습니까? 나를 들어내는 일에 안달을 부리고, 인색을 알뜰함으로 둔갑시켰으며, 얄팍한 지식으로 세상 모든 것을 아는 듯 잘난 체 했고, 선한 척 위장하는 등 고쳐야 할 오답들이 수두룩합니다.

주님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늘 가슴에 새기며 주님이 내주신 삶의 시험 문제에 오답을 줄이겠다고 주님 앞에 약속합니다. 잠시 내게 맡기신 복을 나누는 일에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나눔과 봉사를 삶의 첫 번째 자리에 올려놓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삶을 살겠다고….

내일도 하느님께서 지으신 평화의 햇살은 빈부, 명예, 권력, 강약에 차별 없이 골고루 밝음과 온기를 공평하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겨자씨만큼 작은 나눔이 때로는 어떤 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하여 소소한 행복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