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성 수필가

함무성 수필가

[동양일보] 해를 등지고 집으로 가고 있어. 침체된 경기 때문인가. 한 일이 없이 마치 퇴근하기 위해 출근 한 것 같아. 어찌하든 하루가 끝나면 모든 사람, 모든 차들이 웅성거리며 다 자기 집으로 가는 행렬이 장관이야.

‘집’. 나도 집이 그리울 때가 많았어. 하우스가 아닌 홈을 말하는 거야. 시집와보니 시댁도 내 집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떠나온 친정도 내 집이 아닌 것 같았지. ‘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묘한 감정을 콕 짚어 말할 수가 없어.

오래 전에, 열흘 동안의 연수를 마치고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차창으로 스쳐가는 수많은 아름다운 집들이 부러웠었어. 시댁에서 분가하여 언덕위의 작은 집에서 살 때였지. 골목을 돌고 계단을 오르며 들어갔던 손바닥만 한 내 집이였지만 최고라고 느꼈지. 왜냐하면 올망졸망한 가족이 있었거든. 집 속에는 가족이 있어야만 집의 의미가 완성되나봐.

해거름에 내 차는 도시를 벗어나 숲속마을에 있는 집으로 가고, 반대편 차로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파트가 가득한 도시로 들어오는 차들이 줄을 이었어. 정체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차량행렬은 개미들의 행진 같았지.

그때 멀리서부터 점점 다가오는 프라타나스 마른가지 끝에서 슬픔덩이 같은 네가 확 달려들었어. 울컥했지. 해질녘의 귀가 길에서 느끼는 충만한 슬픔 같은걸 너는 이해하겠지?

내가 첫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너도 진종일 내안에 머물러 있었잖니. 프리츠 분더리히가 부르는 ‘아델라이데’를 들으면서 용기를 내어 사랑고백을 하게 한 것도 너였지. 나뭇잎들의 속삭임, 새들의 지저귐, 하늘의 천둥소리 까지도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은 네가 함께 있어 촉촉하던 시절이었어.

딸에게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귀할멈 이야기와, ‘라픈젤! 라픈젤! 머릿단을 내려다오.’ 라고 하는 동화를 읽어줄 때도 너는 늘 나와 함께 했을 때였어.

그러나 네가 내게서 사라진 적도 있었어. 깊은 수렁에 빠져 길을 잃었을 때, 마음의 고통을 겪고 배신감에 온 몸을 밤송이처럼 가시로 무장하고 있었을 때 네가 내게서 떠났어. 내 맘은 마른 가랑잎처럼 버석 거렸고 모두가 적군 같았어. 그때는 슬픔과 분노가 물 밑의 전분처럼 굳어 있을 때였지.

내 청춘은 순수의 시기이기도 했고 어리석음의 시기이기도 했나봐. 내 판단이 부모님의 판단보다 옳다고 생각해서 부모님 뜻을 거스르는 고집을 부린 결과도 그중 하나였을 거야. 지나고 보니 세상 살아가는 지혜는 교과서에만 있지 않고 긴 연륜에 깃들인다는 걸 알았어.

창조주는 공평해서 한쪽 문을 닫으면 반드시 다른 쪽으로 문을 내 주신다고 한 걸 믿어. 지금 밤하늘에 보이는 저 별빛이 내게 도달하기까지 수 억 년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서 속단하지 않고 서서히 변화되는 상황을 지켜보려고 노력했지.

까칠한 내 성정이 나긋해지니 그때서야 네가 다시 찾아와 주더구나. 나는 너를 맞으며 순해지고 귀해지려고 했어. 까치 내 강둑에 바람이 몹시 불면 나는 볼이 따갑도록 ‘바람 맞기’를 즐기고, 오동 벌판에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면 온 몸이 노랗게 물들도록 걷기도 했어. 내가 창조주를 사랑한다고, 창조주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순간에도 삶을 기꺼워했었어.

삶에는 네가 안에 머물러 있어야 진정 살아있음을 느껴. 품이 넓은 사람이란 실패도 겪고, 상실도 겪으며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들일거야. 그들은 측은지심도 알고, 배려도 알아. 네가 그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지. 나도 그렇게 다듬어진 것 같아. 삶의 모든 상황은 앞면과 뒷면이 있어. 우리는 그 양면을 다 사랑할 수 있어야 해.

내가 시샘으로 가득 차 있고, 감정이 극에서 극으로 오르내린다고 남편은 늘 걷 잡을 수 없다지만, 그건 아마도 네가 내안에서 출렁거리고 있기 때문 일거야.

때로는 나를 흠뻑 물 먹은 꽃이게도 하고, 또 때로는 깊은 강바닥을 흐르며 ‘외롭다. 외롭다.’ 하게도하는 너는 과연 누구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내 속을 들락거리며, 내 마음을 휘젓는 너를 누구라 불러야 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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