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 시조시인

서문대교

[동양일보] 동상서흥(東上西興), 굳이 편을 가르자면 이렇다. 동쪽은 상당구, 서쪽은 흥덕구다. 통합청주시 출범 이전까지는 그랬다. 무심천은 청주를 동서를 나누고 사람들은 다리로 잇는다. 낭성면 상류부터 추정교, 상야교, 병암교 등을 지나 송천교, 무심철교, 까치내교로 이어지는 하류까지 31개나 있다. 서문대교도 그렇게 태어났다. 도심 한가운데서 자긍심도 있었을 터, 양쪽으로 청홍 띠를 나눠 두른 자태가 곱다. 색동 댕기 늘인 갈래머리, 어릴 적 그녀처럼.

그녀 향한 호기심이 발길을‘디지털청주문화대전’으로 끈다. 기대와 달리 이력이 빈약하다. ‘사직동과 서문동을 잇는다, 1981년 재개통했다, 총연장 153m·교폭 8m·R.C T-Beam 방식이다, 읍성 서문 밖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청주대교 이전에는 조치원 방향으로 나가는 유일한 다리였다, 최근 풍물시장을 철거하고 아름답게 장식했다.’ 이게 그녀의 신상명세서다. 답답해서, 여기저기 전화하고 지나는 사람 붙들고 물어봐도 시원찮다. 안쓰러웠나,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뗀다.

“나이도 잊어버렸구먼. 일정 땔 거여, 옆집과 친했제. 옆집은 1920년 생이라는디 참말로 통이 컸어. 큼지막한 기차만 상대했거든. 우리야 차허구 사람뿐인디 말여. 화통 삶아 먹는다구 하잖여, 시끄럽긴 혀도 지나가는 기적소릴 들으며 심심허진 않았다니께. 근디 옆집 여자가 짐을 쌌어, 그때부터 팔자가 꼬이기 시작했제.” 뭔 소리냐고, 빤히 쳐다보니 부연한다. 서문교 옆에 서문철교가 있었는데, 철도노선이 바뀌면서 폐교됐다. 1968년, 북문로 청주역을 우암동으로 옮기면서다.

이어지는 말소리는 더 가라앉는다. “옆집이 비면서 사달이 났어. 슬금슬금 새 단장을 하더니 아, 글씨 내 손님을 모조리 뺏어가데,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됐제. 인생 참 허망하더군.” ‘음, 음’하는 헛기침에 비애가 어린다. 그녀의 화법대로라면, 폐철교 자리에 1970년 준공된 청주대교가 서문교 기능을 흡수했다.

“외로워 미치겄는디, 죽으란 법은 없는개벼. 한참 몸살을 앓고 나니, 원제부턴가 쬐끄만 점포가 하나둘씩 모여들더라구. 거기서 잔술도 팔구, 공구도 팔구, 온갖 잡동사니를 다 보듬었제. 그래노니 사람들도 다시 꼬이는 겨. 그까짓 자동차야 뭐 대수간디, 사람이 젤이제.” 해는 서녘으로 기우는데, 어조에는 힘이 실린다. 차츰 구경꾼이 모여들자 당국에서 아예 풍물시장으로 만들었으니, 1989년도다.

“월매나 신이 났던지, 어깨춤을 덩실덩실 췄구먼. 글씨 나를 당국이 인정해준 거 아닌가배? 시상은 돌고 도는 건가벼. 나야 뭐 북적거리니 좋았제. 술에 객기 부리는 인사도 여럿 봤구, 멱살잽이하는 것도 챔견허구…. 암튼 사람 많은 데니 별일 다 있었겄제. 근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던개벼. 십 년 넘게 아웅다웅 어울리며 살았는디, 참말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는디, 글씨 어느 날인가 풍물시장을 읎앤다는 겨. 2001년도구먼. 팔자도 참 기구허제.”

속이라도 좀 달래라며 담배를 내밀었다. 사무쳤나, 콜록콜록하면서도 연신 들이켠다. “옆집 여자한테 손님 내줄 때보다 더 속상했어. 더 좋은 인연 맺어준다는디 뭔 불만이냐구, 시청에서 나온 사람들이 퉁바리를 놓데. 허름하긴 해도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섞이는 게 나는 좋은디 말여. 그러니 워쩌겠어, 내 몸 내 맘대루 못허니….”

어둠에 편승한 냉기가 무심천을 에워싼다. 물결마저 이성을 잃었나, 무심한 척해도 차디차다. 더듬거려 슈퍼를 찾고 소주를 샀다. 추위를 물린다며 한잔 권한다. “새로 만난 친구는 상징조형물이여, 작품을 공모했다더만. 길쭉한 쇳덩이 두 개를 둥그렇게 마주 세워 놓데. 제방과 하천 바닥은 배의 선체를, 다리 상단은 갑판을, 조형물은 돛을 상징한다나? 옛지명 주성(舟城)을 연상한 게지.” 상당과 흥덕 간의 화합을 바라는 뜻도 담겼다고 들었단다.

“그러니께 풍물시장 헐구 다음 해인 2002년도에 완성됐어. 나는 한 번 더 팔자를 고쳤제. 거기에 조명도 달구, 시화며 사진도 걸구, 사람들 쉬는 벤치도 만들구, 이것저것 해놨어. 많이 깨끗해졌제. 사람들이 시화도 보구, 추억 사진도 찍구, 앉아서 정담도 나누면서 인파가 늘더라구. 근디 말여, 사람은 변하기 매련인가벼. 전에는 왁자지껄한 게 좋더니만, 그들 떠나면 못 살 거 같더니만, 그게 아니더라구. 점잖은 이들 가까이하다 보니 나도 쬐끔은 문화인이 됐나 싶어, 남들이 워찌 생각할랑가는 몰라도.”

홀짝홀짝 넘겨선가, 얼굴이 벌개진다. 취기는 늘 거침없는 법, 묻지 않아도 술술 쏟으니 소주에게 감사하다. “근디 말여, 여기선 별걸 다 구경한다니께. 원젠가 여름인디, 내 참 별 희한한 사람들을 봤구먼”

김선호 시조시인
김선호 시조시인

 

아마도 60년대 어느 여름이란다. 고등학생 너덧이 그녀를 찾아왔다. 가위바위보를 하더니 승자가 냅다 무심천으로 뛰어든다. 기겁하는 그녀에겐 아랑곳없이, 다들 부러워하는 눈빛이다. 물기를 훔쳐내는 승자도 환하다. 알고 보니, 승자만이 자장면을 먹되 물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나머지는 먹는 걸 지켜만 보는 규칙이다. 패자의 허기를 조롱하며 즐기는 포만감이 쾌감을 더했을까? 혈기 왕성한 학생들의 이상한 놀이는 여름내 계속됐다.

“한번은 장마가 오래갔제. 시뻘건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더구먼. 숨이 캑캑 맥히는디,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라구. 이를 물구 버텼어. 세간살이며 가축이 휩쓸려가는디, 바라볼 수밖에 없었구먼. 서민들 큰 살림인디, 안됐더라구.”

달빛에 지웠을까, 홍조가 가셨다. 자세를 고치더니, “대개 잇속 찾아 옮겨 가잖여, 첨엔 그게 부러웠제. 근디 붙박아 살면서 깨우친 게 있어. 벚꽃 피제, 단풍 들제, 눈비 오제, 때맞춰 변함없는 자연 이치가 눈에 들더라구. 팔자는 몇 번 고쳤어도, 여기 안 떠난 게 젤로 잘한 일여. 그래서 미래유산도 됐제. 참말로 행복허구먼.” 시끄러운 속일랑 예서 비우라고, 조명등이 법어를 쏟아낸다. 서문대교는 어머니다. 숱하게 밟혀도, 온갖 풍상 몰아쳐도, 묵묵히 받아주며 자리를 지켜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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