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착한어린이신문 사무총장

청주 시계탑
청주 시계탑

 

[동양일보] 1. 청주의 관문, 랜드마크로서의 시계탑… 사직동과 사창동의 변천사를 간직한 표지석

사람이 사는 곳엔 길이 생겨난다.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이거나, 사람은 길(路)을 따라서 길을 만들며 살아왔다. 사방으로 도로(道路)가 이어지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街)’가 생겨나면

사직대로, 시계탑 오거리, 충북대 중문 같은 생활·문화 공동체가 형성된다. 무엇으로 불리든, 길은 인류문명 발전사에 ‘길이 있는 곳에 역사가 있다’는 선험적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다.

내수동 고갯길을 따라가 보자. 70년대만 해도 우암산 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청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청주를 동서로 길게 나누며 무심천이 흐르고, 무심천 중앙부를 가로질러 조치원 방향으로 쭉 뻗친 도로가 보인다. 지금의 사직 대로다. 옛 충북은행 본점에서 대교를 건너 분수대와 청주실내체육관을 끼고 옛 사직파출소까지 오르막길이 이어지는데, 바로 내수동 고개다. 고갯마루에 중앙분리대처럼 시계탑이 떡하니 서 있다. 지금이야 주변 빌딩에 치어 잠잠한 크기로 보이지만 70년대만 해도 제법 우뚝해 보였다. 당시 시내와 외곽을 규정하는 기준이 ‘시계탑에서 어느 쪽?’이었으니 청주의 관문으로써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사실 지금의 시계탑은 2009년 11월 재조성한 것이다. 11m 높이에 하단부에 '直指-직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전 시계탑은 무심천 인라인스케이트장 공원으로 옮겨져,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기왕이면 시계탑의 최초 제작 연도나 언제,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에 관한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청주시 서원구 사창동 262-4에 위치한 ‘사창 시장’
청주시 서원구 사창동 262-4에 위치한 ‘사창 시장’

 

2. 사창 시장과 충북대 중문-번성기…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내수동 고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사창 시장이다. 내수동이란 지명의 본거지가 바로 사창 시장이기 때문이다. 시계탑 오거리의 한 축인 내수로(內水路)란 도로명도 여기서 따왔다. 사창 시장을 낀 일방통행로에서 충북대 중문을 거쳐 공단오거리 가로수로 직전까지가 내수로다. 사창 시장은 ‘사창’이라는 이름 때문에 약간의 오해가 있지만, 실은 조선 시대 나라의 식량을 비축해 놓고 배고픈 이들을 구제하던 ‘사창(司倉)’이 있던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전국 곳곳에 사창이 많이 있었지만, 현재까지 ‘사창동(司倉洞)’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청주 사창동이 유일하다.

사창 시장은 청주에서도 큰 시장에 속한다. 1980년대 이후 40여 년간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2005년 새롭게 단장한 아치형 아케이드를 지나다 보면 어느 땐 마치 커다란 수조 속을 유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사람 냄새와 웃음소리와 오감으로 전해지는 사람의 온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편안하고 넉넉해지는 기분은 덤이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는 최전방 삶의 현장이다.

채소 장사로 3남매를 키웠다는 이재일(87세) 할머니가 쪽파를 다듬으며, 지금 생각해도 울컥하듯 30년 세월을 되짚는다. “속아서 저당 잡힌 집에 전세를 들었는데 결국 집이 넘어갔지, 어쩌겠어, 문 앞에 주저앉아 뜨개질만 했어, 울며 막아서기도 하고....여기가 담벼락이 있던 그 자리여. 어휴”, “ 앞으로 한 3년, 90까지는 할까 몰라” 간간이 던지는 말속에서 87세, 고단했던 생의 애환이 묻어난다.

10여 년간 이곳 상가 번영회를 이끌어 온 이명훈 씨(64, 충북상인연합회장)도 사창시장 40년 역사를 막힘 없이 풀어 놓는다. “점포의 40% 이상이 농축산물이니까, 공산품 쪽보다는 정육이랑, 채소, 떡 같은 먹거리가 강점이지요.”,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빈 가게가 하나도 없다는 게 보람이자 자랑이지요”

틈틈이 토종닭 손질을 하며, 방송 나가고 대박 난 반찬가게, 2대째 손두부 집을 운영하는 누구네 얘기 등, 시장 곳곳의 얘기를 들여준다.

사창 시장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일상의 산책로며 생활 한복판에 있는 쉼터다.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는 곳이다.

사창사거리를 분기점으로 사창시장에서 서쪽으로 도로 건너편에도 눈여겨 볼만한 상권이 형성돼 있다. 충북대 중문 상권이다. 충대 중문은 서울의 홍대거리처럼 사창동 일대를 아우르는 젊은이들의 거리를 말한다. 패스트푸드점, 영화관, 커피숍, 식당, 술집, 노래방이 즐비하고 각종 동아리 공연, 버스 킹 같은 거리공연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있다. 인근 원룸촌이 들어서면서 젊은 유동 인구도 많이 유입되어, 낮보다는 밤이 화려한 곳이다. 요즘은 조금 주춤해졌지만 언제든 젊음의 열기가 살아날 수 있는 20대들의 핫플레이스다.

 

사창 시장 내 상인들이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사창 시장 내 상인들이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3. 청주 아파트 문화의 시작-사직주공아파트

시계탑 오거리에서 예체로를 찾아 들면 또 하나 이야기를 만난다. 내수동 고개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고갯길이다. 위쪽(서쪽)은 사창동, 아래쪽(동쪽)은 사직동으로 나뉘는데, 아래쪽에 접한 사직동 주공아파트 얘기다. 청주에서 아파트 문화를 여는 첫 대단위 아파트 단지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입주가 시작되면서, 단층 주택이 주를 이루던 이곳에서 5층짜리 아파트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직주공아파트 단지는 괜찮은(?) 또는 깨끗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인식되어, 아파트 입주민들은 묘한 선민의식에 5층 높이만큼이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특히, 신혼부부에게는 사직주공아파트가 로망이던 시절이었다.

필자의 경우가 그랬다, 직장 인사이동으로 서울에서의 단칸방 생활을 마감하고, 청주로 내려오면서 이곳 사직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이사짐을 정리하며 건너편에서 물걸레질하고 있는 아내 등 뒤에 대고, “여보, 어딨어?, 치울 거 있으면 불러!”, 방 두 칸, 거실 겸 주방이 있는 열 세평 짜리 아파트가 얼마나 넓다고.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오는 민망한 허세였지만, 짠하고 애련한 추억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터는 꿈도 못 꾸고, 아파트에 웬 연탄아궁이 하겠지만 김장하듯 연탄을 들여놓는 것으로 월동준비를 하던 때다. 웬만한 이삿짐이나 무거운 가전제품을 옮길 때면, 친지나 직장 동료들을 불러 이사 품앗이를 하곤 했다. 돌잔치도, 초상도 다 아파트에서 치렀다.

한 세대는 족히 흐른 세월이다. 당시 대여섯 살 미취학 아동이던 딸 아들이 다 출가해서 고만한 손주들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또한, 사직주공아파트는 25년 만에 당시 중부권 최대 규모 재건축사업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2009년 11월, 사직 주공 2, 3단지가 재건축을 통해 3,500세대의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주공1단지가 있던 자리에 대원칸타빌 810세대가 들어서 있다. 여전히 내수동 고개–시계탑 주변의 아파트 단지는 명실상부한 청주 아파트 문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4. 시계탑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징검다리다.

시계탑 오거리는 청춘의 약속, 노년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내수동 고개-시계탑 5거리로 통칭하는 이곳이 당시 서쪽을 드나드는 관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청주를 지칭하는 ‘주성舟城’의 한복판, 돛대 자리쯤 될 것이다.

시계탑 오거리는 다섯 갈래로 나뉜 이야기 길이다.

내수동 고개를 오르내리며 마주쳤던 청주고등학교 남학생들과 청주여고(지금의 상당공원 옆) 여고생들과 풋풋한 연애담도 있었을 터이다.

사창 시장에서 업어 키운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신·구 세대가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청주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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