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간 주변의 은혜로 살아…매일 책 읽고 성경 쓰고 있지요”

[동양일보]14세 신문배달 소년이 최연소 충북교육감이 되고, 신자가 아니면서 최초의 가톨릭대 총장이 되는 등 감동과 화제의 중심이 되어온 유성종(劉成鍾. 93.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아이파크아파트) 전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총장.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노 기자의 수첩에 올라 있는 많은 명사 중 첫 인터뷰 대상자로 유 총장을 정한 것은 올 곧은 성품과 늘 학구적인 자세의 삶이어서 지역의 ‘큰 어른’으로 섬김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 여전히 건강하시죠? 7년 모자라는 1세기를 살아오셨는데, 건강관리를 위한 특별한 비책이라도 있으신지요.

“90이 넘으니까 주변 분들이 건강법이 무엇이냐고 자주 물어 오십니다. 그럴 때마다 대답할 것이 없어서 민망해요. 가난한 시대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 난데다 광복되던 해 청주상업학교(후에 청주상고, 현재 대성고)에 입학했고 선친이 광복 열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열네 살 때지요. 학교 은사님의 권면으로 신문배달을 하게 된 때도 이 때였어요. 그러니 내 처지에 무슨 비타민 하나라도 먹을 수 있었겠어요? ‘굶기를 밥 먹듯 한다’는 말 사실이지요.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났으나 초근목피의 궁핍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지요. 병약했고, 학비를 벌어 보태야했으므로 쓰러지면 안 된다는 일념뿐이었지요.”

-그래도 용케 헤쳐 나오셨지요?

“주변 많은 분들의 은혜였지요. 홀어머니는 행상을 하셨고, 나는 신문배달을 하고…그래도 밤을 밝혀 공부한 보람이 있어 중학교 4,5학년 땐 전교 수석도 했어요. 영양실조로 병을 얻었던 6학년 때 전쟁이 났고, 의용군에 끌려갔으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으로 귀가조치 되었어요.

이듬해인 51년에 청주상업중학교 추가 졸업증서를 받았지요.”

 

 

비타민 하나도 못 먹은 어린시절

유 총장은 1957년 ‘고등학교교원자격증’을 따고 그 해 5월 모교인 청주상고 국어교사를 시작으로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교사시절, 실업계 고등학교용 ‘상업문’(후에 ‘문서사무’와 ‘사무관리’로 분책돼 검정교과서로 출판)을 저술했다. ‘대성학원40년사’편집-유네스코충북협회 조직-충북도교육위 장학사- 청주주성중 교감-중등교육과장-충주고교장이 된다. 그의 생애 중 충주고 교장(1981.3~1983.3)2년간 쏟은 열정과 거둔 보람은 매우 큰 것이어서, 첫해 38회 졸업생은 서울대 35명을 비롯해 120명이 명문대에, 서울소재 대학 합격자가 졸업생 600명 중 85%에 이르렀다. 이듬해 39회 졸업생은 예비고사 340점 만점에 학교평균 270점을 기록해 ‘전국 최고’성적을 보였다. 이 해 졸업생 중 육.해.공 사관학교 출신 중 후에 모두 장성이 나오는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배출돼 전국의 화제가 됐다. 유 총장은 그 때를 회상하며 “무서운 세력으로 뻗어나가는 충북의 동력(動力)을 보았다”며 “도 교육위 학무국장 발령으로 더 이상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충주고를 떠난 것이 아쉽다” 고 토로한다. 그는 1984년 6대 충북교육감으로 선임 돼 51세 전국최연소 교육감이 된다. 7대 교육감으로 재선임 돼 1991년 11월 교육감 직 사임까지 7년간 단재교육원, 학생과학관, 학생회관, 학생종합야영장을 설립했다. 청주중앙도서관을 신축하고 1시,군 1도서관을 건립했다. 과학고, 체육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성화 공립학교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설립한 것도 주목을 받았다. 모교인 청주대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주성대(현 충북보건과학대)학장 임기를 마치자 1999년 돌연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현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교육감-학장출신의 ‘68세 신입생’이라서 수 개월간 언론에 시달렸다. 4년간 장학생으로 대학을 나왔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졸업 다음 해, 그는 뜻 밖에도 모교가 된 꽃동네대 총장으로 추대, 2004년 3월 비신자로는 첫 가톨릭대 총장이 된다. 2년 뒤, 그는 오웅진 신부와 함께 정진석 추기경의 서임식 축하를 위해 로마에 갔다가 가톨릭 박해 때 신앙중심생활 공간이던 지하공동묘지 카타콤바(Catacombe)에서 오웅진 신부에게 영세를 받는다(본명 ‘토마스 아퀴나스’) 일찍 가톨릭 신자가 된 부인 조행자(91)여사는 물론 주변 사제들의 염원이 이뤄진 것이다. 그로부터 주일이면 빠짐없이 성당에 나가는 ‘찰 신자’ 유 총장은 50년 공직생활에서 벗어나 이젠 완전한 자유인. 동양일보 회장실에 앉자마자 인터뷰를 시작했다.

 

 

‘율양동’을 ‘율량동’이라 잘못 써 지적해도 못 고쳐

-우리 지역의 현안 문제가 무엇인지요.

“2009년 도산서원 상유사(上有司, 원장)를 연임해 4년간 봉직하면서 느낀 점이 참으로 많아요. 퇴계선생을 숭앙하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안동사람들은 조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남의 욕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조상과 지역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사랑의 기풍이 부럽습니다. 450년 퇴계문하의 15대 후손들 1000명의 회원을 지닌 ‘도운회(陶雲會)’를 중심으로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어요. 우리지역은 그런 중추세력이 없잖아요? 심지어 동(洞)이름 하나 틀린 것을 바로 잡는데도 힘들어 포기상태지요.”

-좀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신다면?

“청주시 청원구 율양동의 경우지요. 엄연히 ‘율양동(栗陽洞)’인데, 왜 ‘율량동’으로 써요. 2008년부터 이를 지적하여 청주시의장에게 청원서를 냈더니, 민원을 접수하여 청주시장에게 이첩했다는 통보만 왔을 뿐 이예요. 4년 뒤 새 의장에게 다시 냈더니 한글학회 유권해석을 받아보니 청원인 주장이 맞는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시청 측에선 율량동이 커져서 분동을 할 때 고치겠다하더니 이제껏 감감무소식이에요. 동 이름 하나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는 행정기관이 건물만 요란하게 짓는다고 무슨 공신력이 있겠습니까?”

- 근래 들어 특별한 일은 없으셨는지요.

“지난 해 11월에 둘째 딸 (아영.64)이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3개월간 외출을 삼가 했지요. 음성 ‘꽃동네낙원’에 안장했어요. 그간 부모님 묻히신 괴산군 사리면 선영에 나와 아내의 평장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딸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영면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간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 실감하지요.”

-지금도 식사를 간편하고 적게 드시나요?

“소식을 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 기름기와 고기류를 꺼리고 밥 한 공기를 다 먹은 적이 없지요. 그러니 언제나 속이 편하고 피로감을 느끼지 않아요. 많은 이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먹는 것이 너무 풍요로워서 병도 풍년이 드는 것이나 아닌지요.”

-교육계나 후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자, 그리고 지나치게 똑똑 하려 하지 말라 입니다. 제발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사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고 싶습니다. 한 때 연식정구를 했는데, 나한테 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속으로 언제나 ‘이기고 즐거워하라’였습니다. 좌우명으로 5무(無) 7면(勉)을 정하고 지키려합니다. 5무는 무욕(無慾:탐욕을 없애고)무경(無競:남과 견주거나 다투지 않고) 무언(無言:맛, 성공, 완성, 종결 등을 말하지 않고)무원(無冤:남 탓, 원망을 하지 않고)무벌(無罰:남을 책하거나 벌하지 않음)입니다. 하루 일과는, 오전엔 한글이나 영어로 성경쓰기를 4회째 해오고 매일 오후엔 워드로 3시간 성경을 치고 있습니다. 남는 시간엔 독서와 리딩, 라이팅, 스피킹을 하지요. 5년 전부터 외부 강연은 끊었습니다.”

 

-총장님의 잊혀 지지 않는 사진 한 장.

1991년 11월 26일 7년간의 교육감 직을 떠나는 날 도열한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동안 봉직했던 도교육청 청사를 향해 큰 절을 올리시는 모습입니다. 총장님의 가지런한 구두바닥이 크게 보이는 엎드린 뒷모습인데 영 잊혀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끼는 사진도 하나 있습니다. 도산서원 원장 때 퇴계선생 묘에 참배하고 내려가는 뒷모습을 이동춘 사진작가가 찍어 개인전시회에 포스터로 썼어요. 사진의 캡션이 ‘뒷모습에는 거짓이 없다’였습니다.”
 

‘뒷모습에는 거짓이 없다’  유 총장이 도산서원 원장 시절, 퇴계선생묘소에 참배하고 내려가는 뒷모습을 사진작가가 촬영해 포스터로 사용한 사진.
‘뒷모습에는 거짓이 없다’  유 총장이 도산서원 원장 시절, 퇴계선생묘소에 참배하고 내려가는 뒷모습을 사진작가가 촬영해 포스터로 사용한 사진.

 

-우연히도 감동적인 사진 두 컷이 모두 총장님 뒷모습인 것은, 보이는 앞 보다 보이지 않는 뒤가 더 깊고 아름다워서가 아닐까요?.

“………”

93세의 유 총장은 2시간 30분간의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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