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하고 평화로운 고택
정겨운 운보 김기창 화백의 흔적이 곳곳에
유영선(동화작가·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 유영선 주필]그리움, 설렘, 그리고 평화로움....햇살이 순해진 봄날, ‘운보의집’을 찾아가는 내 마음이 딱 그랬다.

얼마만인가. 운보 선생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시나브로 찾던 이곳을 잊고 살다가 십수 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아니 잊고 살았다기보다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운보 선생이 떠난 후 한동안 재단이 표류하면서 시끄러울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곳을 오지 않았다. 그 후 새로운 재단이 꾸려지고 운보의집과 운보미술관의 운영이 모두 정상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왠지 낯설 것 같은 선입견으로 선뜻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찾은 운보의집은 예전과 다름없이 고졸했고 평화로웠다. 아니 더 정갈해지고 고즈넉해졌다. 풀 한 포기 티끌 하나 없이 정돈된 마당과 잘 가꿔진 정원수의 모습이 마치 시간을 비껴간 정물 같았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자 먼저 고택의 툇마루와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햇살이 하얗게 내려앉은 저곳에 운보 선생이 앉아계셨었지. 빨간 양말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그리고 연못 위 정자로 안내해 맑은 차를 주시며 필담을 하셨었지. 무엇을 하셨냐고 물으면 자막이 있는 ‘007비디오’를 보셨다고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자를 바라보니, 정자위에서 운보 선생이 빨간 양말을 신고 등짐을 지고 서계신 듯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위험하기 때문일까 정자로 오르는 길에는 접근을 막는 줄이 처져있었다.

운보의 집
운보의 집

 

운보, 독창적 화풍으로 한국화 새로운 개척

이 집을 지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은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16세에 숭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웠다. 1946년 동경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화가인 우향 박래현을 만나 결혼하였고, 1956년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수도여자사범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백양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수많은 해외전을 열었다.

운보의 집.
운보의 집.

 

그의 그림은 정통 회화에서부터 추상 등을 거치면서 자신의 조형 욕구를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대범한 스케일과 활달하고 힘찬 붓놀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사실회화’에서 ‘청록산수’ ‘바보회화’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그림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1993년 팔순을 기념해 열린 서울 예술의전당 전시회 때는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1만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린 것도 운보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경력이다. 그러나 일제 말 신문 등의 대중매체에 그린 삽화로 친일화가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이 점에 대해 운보는 생전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의 호는 원래 어머니가 지어주신 운포(雲圃)였지만, 해방 이후 굴레와 구속을 벗었다는 의미로 ‘口’자를 떼어내 운보(雲甫)로 바꿨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운보 지하전시실
운보 지하전시실

 

1976년 짓기 시작 7년여만에 완공한 전통 한옥

운보의집은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292-41에 위치한다. 운보는 1976년 부인 우향 박래현과 사별한 후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에 집을 짓기 시작해 7년여 만에 완공, 1984년부터 정착해 작품활동을 하며 타계할 때까지 이곳에서 노후를 보냈다.

공기 맑은 산자락 3만여 평(현재 재단소유는 2만여평)에 전통양식의 한옥을 지어 작품과 생활을 하는 공간으로 이용했고, 집 뒤편으로 우향미술관(현재는 운보미술관)을 지어 우향과 운보의 작품을 전시했다.

안채는 아늑한 살림방과 대청마루, 위풍당당한 대들보 3개가 눈길을 끄는 넓은 마루방이 있다. 거문고와 북, 달항아리가 있는 마루방에는 주인의 손때가 묻은 책상과 붓통이 있고, 책상 아래로 흰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리고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주인을 기다리듯 의자에 지팡이가 걸쳐 있다. 마루방은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격자무늬 창살을 통해 간접조명처럼 푸른 빛이 비친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은 지하방이다. 한옥에 지하가 있다는 생각부터가 파격이다. 운보 생전에는 개방하지 않았던 이곳은 그림을 그리는 창작실이었다. 말년의 많은 그림들이 이곳에서 탄생됐다. 임수정 운보문화재단 이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따라 지하방으로 들어서자 예수의 고난상을 한국화로 표현한 갓 쓴 예수 일대기 예수의 생애’ 30점이 전시되어 있다.

원화와 거의 흡사하게 보이지만, 실은 판화예요. 지하라서 여름철이면 습기가 차 그림전시가 쉽지 않답니다. 처음 왔을 땐 이 방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책이며 그림 등이 모두 물에 젖어있었어요. 이 공간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고민 끝에 전시실로 만들었어요.” 임 이사장이 나무로 된 벽체를 만지며 설명을 했다.

 

운보 김기창 화백
운보 김기창 화백

 

운보와 우향의 미술혼이 담긴 운보미술관

운보의집 뒤로 이어지는 미술관은 운보와 우향의 예술혼이 그대로 담겨있는 곳이다. 운보 동상과 눈맞춤을 하고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운보의 생애 연표와 주요작품이 전시돼 있다. 연표에는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과 동시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이 등장한다. 생전의 운보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 부인’을 꼽았다. 정신적 가치를 물려준 외할머니, 글공부와 그림을 배우도록 이끌어준 어머니 한윤명 여사,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운보와 결혼, 17차례 부부전과, 해외전시, 가정생활과 작품활동 등 모든 일에서 동료이자 매니저 역할을 한 부인 우향. 전시실을 돌다보면 ‘화가 난 우향’이라는 그림이 보여 미소가 지어진다.

살림하랴, 육아하랴, 작품활동하랴, 혼자서 동동거리면서 화가 난 우향을 지켜보다 ‘뿔난 도깨비’로 그린 그림이다. 우향은 해외전시 때마다 ‘삼중통역사(영어-한국어-수화)’로 운보의 귀와 입이 되어주었다.

 

운보의 책상
운보의 책상


운보미술관에도 숨은 공간이 있다. 바로 지하전시실이다. 이곳은 원래 작품수장고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운보의 다양한 삽화와 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 바깥, 야외로는 잔디밭과 연못, 조각공원

운보의 집 정자
운보의 집 정자

이 펼쳐진다. 예전에 비해 공간이 넓어졌고,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한결 아름다워졌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면 언덕 위에 운보와 우향의 무덤이 있다. 새소리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정적과 평화가 있는 아늑한 자리다.

안내를 하던 임 이사장이 말을 건넨다.

“지금은 꽃이 없어서 쓸쓸하지만, 5월에 다시 오시면 운보의집 마당에 모란이 활짝 피어있을 거예요.”

언덕을 내려오는데 바람이 숲을 흔들며 봄을 쏟아놓고 있다. 눈이 부셨다.


임수정 운보문화재단 이사장 인터뷰

임수정 운보문화재단 이사장
임수정 운보문화재단 이사장


책임감 무거워...지역사회에 활짝 열어놓고 싶어

그새 16년이 되었네요. 2007년도 1월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거든요. 2006년 여름무렵, 예전 재단측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운보의집을 구경왔다가 한눈에 반했어요. 정원과 고택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앞뒤 재지않고 덜컥 재단 일에 뛰어들었지요. 운보재단의 문제가 지역사회에서 그렇게 시끄럽고 복잡한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알고 보니 우리가 25번째 제안을 받은 것이더라고요. 처음 3년간 고민을 많이 했어요. 떠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2008년 12월 딸을 낳았어요. 딸을 낳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저는 광주가 고향이지만, 우리 딸은 여기가 고향이잖아요. 운보의집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아유, 그동안 고생한 것은 말도 못해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런데 이번에 운보의집이 청주시의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은 듯해서 기뻤어요. 물론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 것도 사실이고요.

코로나 전에는 관람객들이 연평균 2만~3만명 정도 다녀갔어요. 몇 차례 기획전시와 어린이날 행사도 열었었지요.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발길이 끊겼어요. 다행히 요즘엔 찾아오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런데 외지에서 오시는 분들이 70%정도 되는 것 같아요. 미래유산지정을 계기로 운보의집을 지역사회에서 사랑받는 공간으로 활짝 열어놓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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