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뛰어넘어 평화를 그려내다
세계를 하나의 화폭으로 바라본 현장작업
자연미술가 허진권 작가가 담아낸 ’PEACE‘

 

[동양일보 도복희 기자]△24절기마다 버려진 공간에 평화를 쓰다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23-2번지, 이곳은 한때 번화가였으나 지금은 도시재생을 눈앞에 두고 방치된 공간이다. 쓰레기와 무너질듯한 담장 가득 담쟁이넝쿨이 담벽락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바닥은 버려진 쓰레기 더미들이 즐비하다. 허진권(68·목원대 명예교수·사진) 작가는 이곳에서 ‘PEACE쓰기’ 작업을 시작했다. 2020년 2월 19일에 시작해 2023년 2월 4일까지 그의 작업은 24절기마다 지속됐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한 우주의 질서에 맞춘 것이다. 그는 이곳 버려진 가구 위에 평화를 입혔다. 무너질듯한 담벼락 담쟁이넝쿨이 비켜간 곳에 물고기를 그리고 평화를 염원했다. 지난해 우수절에 시작해 올 입춘절 1순환을 마쳤다. 이곳에서 현장작업을 하고 나무와 담쟁이가 절기마다 변화된 24컷의 사진을 담아냈다.

그는 “시간성을 도입하기 위해 시도했던 작업을 통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시간이란 공간에서 에너지에 의한 질량의 변화를 측정한 단위 중 하나라며 이제 또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됐다”고 작업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예술은 평화의 도구

허진권 작가에게 ‘삶은 곧 예술’이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공간 어디라도 하나의 화폭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현장작업은 이러한 예술관으로부터 시작됐다. 허 작가는 대전 은행동에 있는 작업실을 벗어나 전국을 누비며 현장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공간을 뛰어넘는 그의 예술관을 통해 그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는 평화(peace)다. 그는 무너진 담벼락에 ‘PEACE 쓰기’ 현장작업을 한다. 떠밀려온 부표에도 이내 파도에 떠밀려갈 모래바닥에도 ‘PEACE 쓰기’ 작업을 지속한다. 작가는 소유를 원하지 않는다. 예술활동을 통한 결과물을 얻는 대신 현장작업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허 작가의 이러한 작업은 2014년에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되는 2015년에는 대전 이응로 미술관 광장에서 ‘평화와 통일의 프롤레고메나’ 현장작업이 있었다. 2016년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2017년에는 파주 망향의 동산과 평화의 종각 광장에서 8·15 현장작업을 했다.

 

허진권 작가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인간이 태어난 목적은 이웃에게 평화를 주기 위함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 역시 평화를 이루기 위한 도구”라며 “인간의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지향점이 평화이기 때문에 이를 확산시키기 위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 은행동 작업실-또 다른 작업

현재 허진권 작가가 쓰고 있는 작업실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그의 아들(허은찬· 40)이 쓰고 있는 연습실 한쪽을 막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쌓여 있는 작품들이 조금은 위태롭다. 허 작가는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그의 또 다른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구본 작업이다. 지구본을 한가지 패턴의 색으로 칠하고 그곳에 적도 표시를 하는 작업이다. 2020년 9월 목원대 교수직을 퇴임하면서 준비한 것이 지구본 153개이다. 153개란 숫자는 성경에 기인한다. 예수가 부활 후 생업으로 돌아간 제자에게 찾아가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라’ 했을 때 잡힌 물고기 수다.

 

작가는 153개의 지구본에 국경을 없애고 대륙과 바다까지 한 가지 방법으로 통일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 후 우주 운행의 기준이 되는 적도에 점을 찍고 PEACE를 쓴다.

허 작가는 “부활이란 그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닌 죽었던 것이 또 다른 상태로 다가오는 것”이라며 “한가지 역할을 다하고 나면 버려진다. 버려진 것들에 PEACE를 씀으로서 또 다른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탄생하는데 이것이 곧 부활이라고 생각한다”고 의미를 전했다.

 

허 작가가 ‘쓰레기’나 버려진 장소에 PEACE를 쓰는 것은 버려진 것에 또 다른 생명을 줌으로써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주는 작업인 셈이다.

 

 

△허진권 작가가 걸어온 길

자연미술가 허진권 작가는 목원대와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20년 ‘허진권교수정년퇴임전’ 외 40여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같은 해 ‘글로벌노미딕아트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2022년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초대작가, 1982년 ‘허진권 장성옥 결혼 현장전’ 외 단체전 400여회 출품, 1980년 ‘1981, 금강현대미술제’, ‘야투’, ‘오오전’ 1976년 ‘두령전’을 창립하고 출품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평화와 통일의 프롤레고메나ㅡ ILUK현장ㅡ'PEACE쓰기‘를 진행 중이다.

도복희 기자 phusys2008@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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