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바친 솟대제작 ‘조병묵 솟대’ 전시 보관 할 분 찾습니다”

[동양일보]

예로부터 하늘을 향해 세우는 장대와 돌기둥은 인간세상의 염원과 의지의 표상이었다.

 

나무나 돌기둥을 세운 끝에 새를 앉히면 솟대가 된다. 높다란 장대 끝에 앉은 새는 땅과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지켜야하는 소명을 하늘에 알리고, 하늘의 뜻을 땅과 마을로 전하고자 하는 소통의 상징이다. 솟대는 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소망의 몸짓으로 하늘에 이어가려는 간절함의 통로다. 때로는 기원하고, 때로는 그리움을 날려 보낸다. 그리하여 끝내는 하늘의 신명을 받아 가없이 연약한 인간 세상에 위안을 준다.

이 같이 출현한 솟대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몽골-시베리아 등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신앙대상물로, 누천년을 이어 왔다. 재앙이 있는 곳에 신앙이 뿌리내리듯, 뱃길이나 먼 길 떠나는 이들을 위해남아 있는 이들은 염원을 모아 징표를 만들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신령 모시는 곳마다장승과 솟대를 세웠다.

<동양일보 2018년 8월1일자 5면 ‘이 길에 서서’-조철호가 만난 사람./조병묵 솟대명인>
 

조병묵 솟대명인
조병묵 솟대명인

 

송산 조병묵(曺秉黙 81.청주시 오송읍 휴먼시아아파트 202동 802호. ☎010-8789-3193)솟대명인을 소개한 지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명인의 솟대공방은 청주서 조치원을 가려면 지나야하는 청주시 강내면 석화리111-1. 입구 오른편에 전에 없던 크고 잘생긴 건물 하나가 우뚝하다. 2021년 7월에 개청한 청주시 흥덕구청이다. 공방 터는 전 보다 더 넓어 보였다. 몇 년 전에 붙어있던 땅 100평을 더 사들였단다. 그 공방에 낯선 얼굴이 보였다. 교육계 후배이자 서각가인 김동욱(金東旭, 69.전 충북도교육청 교육국장)씨가 자기 작품을 만들며 공방을 지켜주고 있다. 서각 20년에 갖춘 장비가 만만치 않다. 솟대명인의 작품은 갖가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솟대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에 반해, 서각은 형태와 쓰임에 따라 명패부터 각종 걸개 등 작품이 다양해 솟대와 서각의 작품제작은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달라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송산이 52세 때 공주에 살고 있는 목불상의 대가 오해균 명장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목공예의 심오함에 빠져들고 솟대의 명인이 되기까지는 무려 30년 세월이 흘렀다.

자칫 버려 질 뻔한 나무뿌리 등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안목과, 껍질을 벗기고 톱질하고 형태를 만들고 수 없이 사포질을 하고…여인의 속살처럼 다듬어지면 비로소 옻칠로 마무리되는 ‘조병묵 솟대’.

그동안 송산의 솟대 전시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때론 언론을 통해, 때론 풍문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 중 지난해 5월, 국립 세종수목원에서의 40일간 전시는 신문지면을 덮었다. 산림청의 지원으로 그의 크고 작은 솟대 100점이 나들이객의 발길을 잡았다. 어떤 날은 하루 1000명이 넘게 관람을 했다. 보는 이들마다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솟대의 의미와 역사와 새롭게 시도된 갖가지 형상에 탄성을 자아냈다. 특히 옻칠을 입힌 ‘조병묵 솟대’의 창안적이고 심미적인 독특함은 목공 예술의 한 영역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솟대에 옻칠을 입혀 옛 정취를 살리고 깊고 그윽한 때깔을 낸 솟대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었다. 옻칠로 단장된 솟대가 우리 눈에 익숙한 것은, 2004년부터 무려 15년간 끊임없이 새로운 솟대 작품이 나올 때마다 바꿔가며 전시한 그랜드청주호텔 로비 전시가 솟대의 인식을 새롭게 각인시키고 대중화를 견인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5성급 호텔을 이용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을 알리는 몫을 톡톡히 했고, 판매수익도 짭짤했다.

 

솟대에 옻칠 입힌 ‘조병묵 솟대’로 대중화 견인

80대에 접어든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건강한 솟대명인은 27년간을 중,고교 교사로, 10년간을 별난 별정우체국장으로, <아버지가 들려주는 삶 이야기>, <내 인생을 바꾼 아버지의 한마디>, <아이의 인생을 바꾸는 인성교육> 등 자녀 교육관련 책을 7권이나 발간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집안 사정으로 27년을 봉직하던 교육계를 떠나 옛 청원군 강서우체국장을 하던 시절, 국장실을 도서관으로 꾸며 주민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한 사연은 익히 너무나 알려진 사실. 그는 교육자 출신으로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만 아름다운사람이 될 수 있다’는 칸트의 말을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자녀교육과, 바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등을 제시하며 밝은 사회가 되는데 기여코자 노력해 왔다. 그러한 방편의 하나로 그동안 발간한 저서 등을 학교와 기관과 가정에 배포해 왔다. 1991년에 발간한 <아버지가 들려주는 삶 이야기>는 10쇄 5만 권이나 팔렸다. 그 인세로 <세상사는 이야기>등의 요약본 책들을 만들어 주변에 기증해 온 것이 어림으로도 총 3만3천300여 권에 이른다.

그러나 이제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이름 석 자 앞에 ‘솟대명인’이 붙는다. 새벽같이 눈만 뜨면 공방에 나가 솟대작업을 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책을 쓰고, 자녀교육과 인재양성에 관한 강연을 하고, 독서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옻칠 된 책꽂이를 제작하여 130개나 배포하면서도 자나 깨나 솟대제작의 일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노년에 이르러 천직처럼 여겨지는 솟대 제작을 위해서 그는 건강 챙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건강은 어떻게 챙기시는지요.

“새벽 4시에 일어나면 배달되어 있는 조간신문을 세세하게 읽지요.. 그리고 원래는 운동하기 싫은 체질이었으나 ‘건강은 관리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부터 이를 옥 물고 운동을 하러 나섭니다. 살고 있는 오송엔 예쁜 호수가 있어요. ‘돌다리 방죽’이라 불려오는 오송호수. 그 둘레가 2㎞, 집에서부터는 3.5㎞를 매일같이 걷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실내 자전거타기도 20분 쯤 합니다. 아침 호수 둘레길 걷기는 13년째, 횟수로는 4000번은 될 것 같습니다. 걷기란 누구나 알고 있듯, 힐링과 명상과 운동을 겸한 3박자를 갖춰 나이 들어서는 더없이 좋은 스포츠라 여기고 있지요.”

-근래 들어 새롭게 시작하신 일은?

“공개할 일은 아닌데…아내가 일어날 때 따뜻한 물을 한 그릇 아내 방에 가져다주기를 5년 째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위장병이 있던 아내가 건강해졌어요. 3개월 전부터는 아침 식사를 도맡아 차립니다. 식단도 직접 짜지요. 사과 반쪽과 고구마와 감자반쪽, 달걀1개와 양배추 데친 것 등 간단하지만 영양가를 생각해서 식탁을 꾸리지요.”

-그렇게 하시는 무슨 까닭이라도 있으신가요?

“있지요. 제가 아내에게 지은 죄가 많아요. 결혼한 이후 줄곧 가부장적인 행세만 해 왔어요.

그리고 책을 쓴다거나 솟대를 만든다거나 하면서 내 일에만 몰입하다보니 언제부터인지 가족간에, 친구들 간에, 많은 인간관계에서 스스로 ‘왕따’가 되어 있더라고요. 자식들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70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내의 노예(?)로 살아 보자 마음먹었어요. 그랬더니 마음도 편해지고, 사는 맛이 다시 생기더라고요. 좀 늦었지만 지금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모든 것을 성취한 후엔 대개 허탈해 하는 분들을 많이 보는데요.

“행복감을 갖는다고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지요. 요즘 끊임없이 번민하는 일이 있어요. 갖가지 형태의 솟대를 제작한지 30년에 이르다 보니, 그동안의 작품이 1500점을 넘어섰어요. 그 중 선물이나 기증품, 판매된 작품들을 빼고도 아직 300점 정도가 남아 있지요. 현재는 공방이 딸린 뒷방 6,7평 남짓한 공간에 빼곡하게 보관된 이 작품들을 어떻게 보존, 보관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요. 나를 아끼는 분들은 공방 앞 길 쪽에 땅이 있으니 예쁘게 전시관을 지어 작품을 전시하면 방문객들이 늘어날 것이고, 작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질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에요.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제 살아온 날 보다 살날이 턱없이 적은 나이인데다, 언제까지 솟대에만 매달려 여생을 보낼 것인가에 대한 가족들의 우려를 뿌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분들의 뜻에 따라 작품 기증 하겠다” 결심

이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송산의 전화를 받았다. 10일 오전 11시였다.

“어제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남아 있는 작품들을 솟대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아는 분들이 전시 보관의 뜻을 밝혀오면, 기증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송산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송산 조병묵 솟대’-. 어디에 어떻게 자리를 잡아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생명을 이어갈지 자못 궁금하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