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묵 시인

최은묵 시인

[동양일보]올해도 산수유, 목련, 개나리, 벚꽃이 동시에 폈다. 볕 좋은 곳에서는 새순도 벌써 색이 짙다. 얼마간 반짝 추운 아침도 있겠지만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이미 뒤로 넘긴 탁상 달력처럼,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오르는 귀갓길처럼 봄은 가야 할 방향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지난주엔 친척 결혼식에 다녀왔다. 날짜에 붉은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탁상 달력에 시간과 장소를 적어놓은 탓에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휴대전화에도 남겨두긴 하지만 때론 책상에 앉아 바로 볼 수 있는 탁상 달력이 유용하다.

달력에는 여러 색과 모양으로 표시해둔 날이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생일이나 기일, 무슨 기념일부터, 병원 가는 날, 동창 모임, 이런저런 행사와 약속, 그리고 그날그날 남겨놓은 메모나 기록이 빼곡하다.

한 해 중에는 잊지 말아야 할 어떤 날들이 있다. 살아가며 기억해야 하는 날이면 우리는 스스로 기록이 되어 함께하려고 미리 준비한다. 그건 마치 우리 곁을 맴돌다 때때에 맞춰 모습을 드러내는 봄꽃과 비슷하다. 이런 순환이 관계에서 우리는 탁상 달력에 적어놓은 숱한 약속을 살피고 그 대상을 떠올리며 어우러짐의 주체가 된다.

가족과 관련된 날부터 친구 혹은 직장 등으로 확장되는, 그렇게 함께하는 날을 딱 무엇이라 정의하는 건 불필요하다. 누군가는 기다리다 봄꽃을 맞을 것이고 누군가는 잊고 있다가 불쑥 봄꽃과 마주칠 테니 말이다. 정의하지 않아도 모두가 마음속에 간직한 봄꽃 같은 약속이 있을 것이다. 탁상 달력 한 장을 더 넘기면, 두 장을 더 넘기면, 거기엔 분명 소중히 표시해둔 뜨거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때론 단순한 반복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날을 가슴에 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넉넉히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 책상에 놓인 탁상 달력에는 이달에 해야 할 일정이 여럿 남아 있다. 몇 개의 원고를 보내야 하고, 몇 군데의 모임에 참석해야 하고,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상은 얼마나 재미없는가. 이제 이런 메모는 무채색으로 써놓고 조금 색다른 일정을 달력에 표시해두면 어떨까.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가족과 함께 치킨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치킨데이도 좋고, 자녀와 대화를 나누는 날도 좋고, 온 가족이 도서관 가는 날이라든지, 아이의 날, 아빠의 날, 엄마의 날 같은 걸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달력에 무엇을 채우느냐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사람은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러니 탁상 달력 네모난 공간을 사람의 온도로 채워보려는 생각은 평면의 삶을 조금 입체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이미 뒤로 넘어간 달력을 다시 앞으로 넘겨 거기 적힌 기록을 읽어본다. 물리적 시간은 분명 과거이지만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는 순간들이 우리가 살아갈 힘이 된다는 걸 느낀다. 군데군데 손때가 묻은 기록들은 각각 삶의 무게를 지닌다. 그리고 머잖아 그만큼의 무게를 품고 또 한 장의 달력이 뒤로 넘어갈 것이다. 그때쯤엔 탁상 달력 네모난 공간마다 듬뿍 사람의 온도로 채워지지 않을까.

불쑥,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빈 곳마다 적어놓고 싶은 날이다. 이름을 적는 동안 어떤 꽃은 지고 어떤 꽃은 새로 필 것이다. 꽃잎 날리는 거리처럼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느 하루 잠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네모난 하루에 무엇을 담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것이 딱 체온과 같은 것이라면 일 년은 얼마나 넉넉하고 따뜻할지 미리 웃어보면서 말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