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명색이 명포수인데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면 산짐승과 뭐가 달라요…”

 

[동양일보]

쌍알 배기 보다는 외알 배기 한 방으로 끝내줘야 명포수 소리 듣는 거요-


‘총으로 산짐승 잡는 다고 다 같은 포수가 아니’라는 장동환 (충북 옥천군 청성면 거포리 1길50)씨. 사방 100리 안에서 ‘장 포수’로 불리는 장 씨는 1925년생이니 우리나이로 99세. 내년이면 100세다. 1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장 부잣집 아들’이나 ‘장 포수’로 불려온 한량閑良의 세월도 70년이 훌쩍 넘는다. 자신이 “한국에서 살아있는 포수로는 최장수”라고 잘라 말한다. 겨울의 맵찬 기운이 사라지고 봄이 되면 누구 보다 이를 반기는 사람은 장 포수다. 칩거蟄居에 가까운 산골 밭 발치 외딴집에서 훌쩍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청산읍내에 내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산읍내에 가면 70년 지기이자 마작 멤버인 두 살 아래 친구 남한우(97.옥천군 청산면 판수리)씨와 동생 친구인 안철호(85)청산화학 회장이 반기고, 산협山峽을 누비던 무용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술판이 무르익는다. 아직도 소주 서너 병은 거뜬하고, 밤 이슥하면 되짚어 오토바이로 귀가하는 이 장골의 사내를 만났다.
 

 

● 몸이 건장하시군요. 키가 얼마나 되시죠?

“전에는 180㎝가 훌쩍 넘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전에 입던 바지 길이를 줄여서 입어요. 젊을 때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었어요. 부잣집에서 잘 먹고 유도도 2단이고, 힘으로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어요. 해방 직후에 경찰에서 제일 우두머리였던 장택상 씨가 특채하여 경찰관이 되었지요. 그 분 비서실에 사복근무를 하다가 고향인 옥천경찰서로 왔다가 6.25가 났어요. 당시 전국적으로 부자라고 소문났던 옥천의 육종관 씨(고 육영수 여사 부친)가 갖고 있던 엽총 4자루 중 하나를 사서 애지중지 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얼른 땅에 묻어 보관해 온전했지요.”

 

 

● 줄곧 경찰에 있으셨나요?

“전쟁이 나고 옥천서가 서대산 공비들에게 습격을 당해 혼비백산하고… 나는 휴전직전에 군인이 되려고 제주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고급부관학교를 나와 육군본부에 배치돼 군 생활을 했어요. 그러나 ‘집에 내려와 있어라’라는 부친 뜻에 따라 제대를 하고는 고향에 내려와 주로 사냥을 하면서 소일했어요. 조부 때 청성면으로 이주해 부친이 꽤나 많은 전답과 산을 갖고 계셔서 놀고먹어도 되는 처지여서 마냥 사냥을 즐겼지요.”



● 주로 어디서 사냥을 하셨는지요.

“군인부대가 많은 강원도를 빼고는 전국을 누볐어요. 전남 곡성이나 경북, 충북의 큰 산은 모두 내 놀이터였고. 때론 몰이꾼들을 7·8명이나 거느렸고, 사냥개도 6마리나 데리고 다녔어요. 30·40대 때 가장 왕성하게 불질(사냥)을 했어요. 평생잡은 짐승은 1000마리도 넘을거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산을 누벼도 지칠 줄을 몰랐어요. 하루 산길 100리는 예사였고 멧돼지나 노루, 궁노루를 잡으면 갖고 있던 빨대를 심장에 꽂아 피를 먹는데 그래서인지 종일 산을 타도 숨 가쁘거나 피곤하지 않았지요. 둘째 아들이 몸이 좋지 않았는데 짐승 사골과 쓸개를 먹여서 회복시키기도 했어요.”



● 주로 어떤 짐승을 어떻게 사냥하는지요?

“사냥 가면서 어떤 짐승을 잡겠다는 계산은 없어요. 산에 따라서 멧돼지가 많은 곳, 노루가 많은 곳, 여우가 많은 곳… 등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산짐승마다 저들의 습성이 다 달라요. 사냥을 하려면 그 것을 잘 알아야하지요. 가령 멧돼지와 궁노루는 꼭 떼로 다니는데, 돼지는 가다가 주둥이로 땅을 헤집고 노루는 산날망(산마루의 방언)에 오르면 멈칫 서서 꼭 고개를 들고 사방을 살펴요. 포수는 이 순간을 노려야하지요. 때론 한 발에 두 마리가 겹쳐서 잡히는 때도 있어요. 몸집이 작은 것들은 잡기가 더 어려워요. 재수 없다지만 여우나 너구리 오소리는 모피도 좋지만 고기 맛도 좋아서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몰이꾼이나 사냥개로 추격하거나 목을 지키고 있다가 결정적인 한 방으로 승부를 내는 쾌감이 있어요.”



● 요즘엔 총을 경찰서에 영치해 놓아서 사냥을 하기가 힘들지요?

“그렇지요. 나는 벨기에 제 쌍발 엽총 등 2대나 영치 했어요. 나이도 들어서 총을 가져도 전과 같지 못할 것이어서 어찌 보면 잘됐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토바이 타고 다니며 나르는 꿩을 ‘날치기’로 하루에도 10·20마리씩 잡아서 호기를 부리던 때가 그립기도 해요. 근래엔 겨우 내가 관리하는 대추밭과 밤나무 밭을 해치는 오소리와 너구리를 덫으로 잡는 정도니 온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지요. 걔들(산짐승들)보기도 좀 창피스럽고(웃음)…”



장 씨는 물려받은 2만 평짜리 산과, 밭 1300평에 대추와 밤나무를 심어 관리하면서 부모님 산소 곁에 작은 창고와 주방 딸린 거실에 방 하나를 붙여지은 숙소에서 살고 있다. 결혼은 17세 때 했고 두 살 위인 부인을 49세 때 사별했다. 그 해 35세 된 여인을 맞아 두 번 째 결혼을 했다. 13년간을 살던 그 부인은 62세 때 사별한다. 근 30년 전 일이다. 그 후 몇 여인들과 동거하였으나 부부간이라 하기엔 너무나 짧은 동거여서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상처가 망처’란 말 입증이라도 하는 듯 그 많던 논밭을 동거녀와 헤어질 적마다 떼어 주고 나니 재산은 턱 없이 줄어들었다. 슬하의 7남매를 공부시키고 출가 시켰다. (아들 둘은 세상을 떠났다) 서울과 인천에 두 아들과 두 딸이, 부산에 막내아들이 살면서 혼자 사는 아버지를 번갈아 찾고 있다. 거실 한 켠에 맥주박스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자식들이 번갈아 가며 택배로 보내오고 있어 매일 아침에 한 병, 저녁에 한 병씩 마시며 산다”고 했다. 오래살다 보니 손녀딸들까지 장성해 할애비를 보살펴 주고 있어 기특하기만 하단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은 세월이 가면서 모두 세상을 떴다. 그래서 오랫동안 즐기던 마작(麻雀; 중국에서 시작된 실내 오락) 친구들도 없어 점점 쓸쓸해지는 것을 느낀다 했다.



● 건강상태는 좋으신가요?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곳은 없으나 자식들이 관절, 전립선, 뇌혈관에 관련한 건강식품을 보내주고 있어 꾸준히 들고 있어요. 32년 전인 67세 때 뇌혈관에 이상이 있어서 수술을 했어요. 요즘 들어 가끔씩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받으면 의사들마다 잡숫고 싶은 것 맘껏 드시면서 사세요라 말해요. 너무 오래 살았으니 이제 그만 살아도 된다는 것인지, 몸에 별 이상이 없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아요.(웃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양로원이나 요양원이나 병원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잠자다 숨을 거뒀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 봐요”

3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최장수 포수’ 장 씨의 또렷한 기억력과 흐트러지지 않는 말솜씨와 몸가짐에 내심 놀랐다. 방에 들어가니 모 일간신문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월간○○>이 빼곡하게 꽂혀있다. 멈칫 놀라는 기색에 “이 신문은 50년 넘게 보고 있고, 이 월간지는 창간 때부터 계속 보고 있다”며 매일 신문의 사설을 빼 놓지 않고 읽고 있단다. 서슴없이 ‘좋은 벗이자 스승’이라 했다.

 

 

● 안경도 쓰지 않고 신문을 보십니까?

“아직 신문이나 책을 보는데 지장은 없어요. 요즘 들어 왼쪽 청력이 약간 약해졌지만 TV보는데 지장은 없어요. 나이 들고 촌에 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조차 모르면 산짐승과 뭐가 달라요. 사는 날 까지는 눈과 귀가 밝고, 분별력이 있어야지요. 내 명색이 명포수 아닌가요?”



예, 최장수 명포수를 뵙게 돼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매주 목요일 게재>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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