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과 배웅의 환대, 기다림이 손짓하는 푸른 서정으로의 초대
강찬모 시인·문학평론가

[동양일보]■ 청주의 첫인상 푸른 생얼굴

청주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23건 중 외지인의 마음속에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된 청주의 랜드마크는 단연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일 것이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경부고속도로 나들목에서부터 복대동 가경천 죽천교에 이르는(6.3㎞) 청주의 ‘관문(關門)’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지역을 불문하고 관문은 도시 출입의 ‘요로(要路)’다. 특히 초행자에게는 도시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대상이므로 잊히지 않는 선명함으로 남는데,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이러한 청주의 푸른 생얼굴인 것이다.

첫인상 5초의 법칙이란 말은 처음으로 만나는 대상과 장소에 대해 갖는 특별한 여운을 말한다. 더구나 그 대상이 탄성을 부르는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첫인상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수밖에 없다. 설령 좋은 첫인상이 이후 실망으로 바뀌었다 해도 호객(豪客)과 강권(强勸)의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듬직하게 서있는 가로수 터널은 떠나는 이의 등을 토닥이며 배웅하니 어찌 다음을 기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우토반처럼 경쟁하듯 차를 몰고 온 사람도 그의 매운 채찍에 놀라 열기가 팽창한 차에게도 홀연히 나타난 가로수 터널은 마치 깜짝 파티를 준비한 친절한 주인처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처럼 좋은 첫인상은 ‘생면(生面)’의 존재들의 경이로운 조응(照應)의 순간에 설렘을 주는 추억의 현(絃)이며 마음속의 그림이다. 게다가 그 장소와 공간이 ‘도시(마을)’와 관련이 있다면 첫인상이 주는 호감으로 도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로 다가온다. 많은 도시와 국가가 관문의 상징성에 주목하며,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청주와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은 가연(佳緣)으로 맺어진 시간의 반려자며 세월의 동반자다.

태초 이래 나무는 인간의 삶 속에서 ‘푸름’이 주는 안식과 평화로 인해 희망과 미래를 상징해왔다. 이런 면에서 청주는 운명적으로 나무와 닮은 식물 친화적인 ‘생태 도시’다. ‘청(淸)’을 파자해 보면 ‘물(氵)’이 ‘푸르(靑)’기 때문에 ‘맑다’는 뜻으로 합자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맑은 물’로만 해석한 것으로 보이지만, 세분해 보면 ‘삼림(森林)의 푸름’에 더 가까움을 알 수 있다. 하나의 글자에 물을 상징하는 동일한 뜻을 반복해 사용할 까닭이 딱히 없으며, ‘맑음’이란 최상의 조건은 물의 상태뿐 아니라 ‘하늘’의 상태를 말할 때도 쓰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맑은 것은 공기가 맑은 덕이고 공기의 맑음은 나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맑을 청(淸)’의 ‘청(靑)’을 ‘나무의 푸름’이라 읽어야 올바른 독법인 셈이다. 우리가 나무의 무성함을 ‘녹색 숲’ ‘녹색 나무’라 하지 않고 ‘푸른 숲’ ‘푸른 나무’라고 하는 데는 아마도 이런 연유가 아닐까 싶다. ‘하늘(天)’을 ‘검은색(玄)’이라고 본 동양적 사고의 특유한 일면을 여기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생태’를 비롯한 범 환경적 개념과 조건은 궁극적으로 ‘물’과 ‘나무’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청주는 태생적으로 나무 도시며, 이것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청주의 관문을 지키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다.

 

■ 나무를 심은 사람들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은 1952년 당시 강서(현재 흥덕구 강서 1.2동) 면장이던 홍재봉 씨와 주민들이 정부의 녹화사업 지원을 받아 플라타너스 묘목 1600여 그루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70년대 초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청주 진입도로가 2차로에서 4차로로 확장되면서 가로수가 모두 잘려나갈 위기를 맞이했으나, 홍 씨와 주민들의 거듭된 탄원에 의해 벌목 대신 옮겨심는 것으로 공사 계획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로수 길의 삶이 순탄하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차량 통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자 2000년대 들어서면서 8차선으로의 확장 필요성이 제기되어 또 다시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때도 지역민들의 강력한 저지에 의해 강서동에서 휴암동까지의 구간(2.48㎞)만을 6차선으로 확장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전면 백지화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최악을 피한 ‘차악(遮惡)’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지금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인근 주민들의 한결 같은 얘기는 잦은 도로 확장 때문에 나무들의 생육 상태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사람보다 차가 중심이 되면서 나무들의 보금자리가 시나브로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홍재봉 씨와 지역민들을 생각할 때마다 장 지오노의 책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인 ‘엘제아르 부피에’ 노인이 생각난다. 그는 무려 3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무를 심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지를 물이 흐르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생명의 숲으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나무가 죽거나 이로 인해 나무 심는 일이 불가능할 때조차 다른 곳에 나무 심는 일을 계속함으로써 만들어낸 경외(敬畏)였다.

중국 당나라의 문인 유종원이 쓴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을 보면 주인공인 곽 씨가 나오는데, 그는 곱사병을 앓아 허리를 굽히고 다닌 탓에 그 모습이 낙타와 닮았다고 해 사람들은 그를 ‘탁타(槖駝)’라고 불렸다. 곽탁타는 ‘종수(種樹)’의 경지에 오른 장인이었다. 권력자들은 곽탁타에게 자신의 집 관상수 돌보는 일을 앞 다투어 맡겼다. 과연 듣던 대로 그가 돌보는 나무마다 잘 자랐다. 같은 나무인데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탁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를 많이 맺게 할 능력이 없다. 다만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고 평평하게 흙을 붇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조바심을 내지 말고 염려하지도 말아야 한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도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왜 그의 이름이 ‘관리’와 ‘가꿈’의 뜻이 배제된 ‘종수(種樹)’ 즉 ‘심는 뜻’만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보여준다. 관리와 가꿈은 본의와 다르게 그 지나친 ‘과잉’으로 당초의 선의가 왜곡된 형태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도를 넘는 관심이 오히려 병이 되는 경우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인 것이다. 곽탁타의 이 말은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물론이고 세상에 생명을 다루고 키우는 일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금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람’이 있는 것은 누군가의 ‘뿌림’과 ‘심음’이 있기 때문일 텐데, 홍재봉 씨와 지역주민들, 부피에 노인과 곽탁타가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 나무가 곧 교육과 문화며 희망이다

언제부터인가 회자되기 시작한 ‘교육도시 청주’는 나무가 상징하는 미래가치와 하나가 되었다. 묘목들이 성장해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길 바라는 교육 철학이 ‘기둥’과 ‘들보’를 의미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고금을 통틀어 나무가 곧 교육의 주제요, 교육의 현장인 역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공자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석가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으며, 서양 의학의 비조(鼻祖)인 히포크라테스는 ‘플라타너스나무’ 아래에서 의술을 전파했다. 이렇게 ‘나무의 도시 청주’가 ‘교육의 도시 청주’로 자연스럽게 합일되는 것은 ‘사람’과 ‘나무’가 함께 써내려간 인류의 지성적 전통이 유전적으로 면면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시민들의 헌신 덕분으로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은 전국 가로수 길의 상징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청주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직접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가로수 길은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통해 꼭 가보고 싶은 장소로 손짓한다. 82년에 리메이크된 이만희 원작 김수용 감독의 영화 ‘만추(晩秋)’는 주인공( 김혜자 . 정동환)이 낙엽을 밟으며 걷던 배경이 됨으로써, 청주 가로수 길이 영상을 통해 보편적으로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모래시계(95년)’는 두 커플 (고현정 . 최민수)의 청신(淸新)하고 아름다운 풋풋한 연정이 물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계절상으로도 ‘만추’는 ‘가을’을 ‘모래시계’는 ‘봄’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청주 플라타너스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두 영화를 보고 이국적인 배경 때문에 해외에서 촬영한 것으로 오해할 만큼 가로수 터널은 당시 열악한 한국의 삼림 정책과 문화 환경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장소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중략)…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널리 애송되는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다. 플라타너스는 창공을 향해 뻗은 훤칠한 자태에서 바라보는 그리운 동경으로 하여 오래전부터 꿈을 꾸는 나무였다.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들은 그와 그냥 가까운 이웃이 되는 것만으로도 늘 꿈을 꾸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하늘이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쉬잇, 플라타너스가 꿈을 꾸는 중이다. 더불어 우리들의 꿈도, 청주의 꿈도 푸르게 푸르게 번진다.

강찬모 문학박사 . 문학평론가
강찬모 문학박사 . 문학평론가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