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옥 시인

박상옥 시인

[동양일보]언니는 몸매가 예뻤다. 유난히 다리가 길었는데, A 라인 교복 치마가 한 뼘 허리에 얹히면 몸이 하늘거렸다. 언니는 수시로 연애편지를 받았다. 나는 순전히 몸매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주먹밖에 안 되는 작은 얼굴에 새침한 표정 때문이었다.

언니는 왕내숭이었다 월사금 고지서가 나오면 숫자 하나를 슬쩍 고쳤다. 용돈을 만들어 친구들이랑 호빵 사 먹고 튀김 사 먹고 사진 찍고 공부보단 친구 사귀고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언니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자주 언니를 질투했지만, 엄마나 누구에게도 언니의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용돈도 없이 그저 학교에 다니는 것만도 좋았으니 군것질이나 학용품을 위한 용돈은커녕 버스 회수권도 없어서 걷고 뛰면서 학교에 다녔다.

언니의 책가방 속에 빛나는 새 문구는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었고 빌려 쓰는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았으니 언니는 표정과 말이 늘 따뜻했고 다정했다. 언니와 반대로 나는 매사 똑 부러지고 톡톡 쏘는 말투로 주관이 분명한 듯 보여, 언니가 부럽긴 해도 언니에게 주눅 들진 않았다.

나도 잘하는 게 있었으니, 언니보다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문예도 잘하여, 자주 학교를 대표했다. 자부심까진 아니라도 학교규율은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교무실을 드나들며 남학생 여학생 패를 지어 다니는 언니 비슷한 성향의 학생들은 고자질하고 단속했다. 규율부가 뭐라고, 에구구 이제 생각하면 어찌나 후회되고 한심스러운 짓거리였는지 모른다.

하굣길에선 언니가 친구들이랑 사진관이나 튀김집에서 친구들과 행복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언니가 탄 버스는 언제나 타박타박 걷는 날 지나쳐선, 언니를 나보다 먼저 차부에 내려 주곤 신작로 가득 뽀얀 먼지를 남기며 후포리 고개로 사라졌다.

언니에 비하면 나는 중 다리 중키에 불과했기에 내 오동통한 몸매는 주목받지 못했다. 언니는 엄마 몸매를 난 아버지의 몸매를 닮았다. 더군다나 나는 이마까지 톡 붉어져 별명도 짱구에 통통돼지였으니, 그냥 말괄량이 모범생일 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딸 다섯 중에 유독 엄마의 하얀 피부를 닮은 것은 나였다. 이젠 하얀 피부도 별로인 나이가 됐지만 나이 들수록 몸매보단 피부도 한몫했으니, 여고시절 가정교사 조윤희 선생님이 너는 컬로 로션 바르고 학교 오면서 다른 학생들을 단속한다며 내 뺨을 손수건으로 긁어보는, 희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나는 종부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엄마를 자주 연민했다. 아들 귀한 집 종부로서 딸 다섯을 낳아 키우느라 엄마의 시집살이는 늘 눈물과 한숨으로 바늘땀을 꿰었으므로, 나는 호랑이 할머니와 아버지 에 짓눌린 가엾은 엄마에게 오로지 순종했다.

모진 시모와 무심한 남편 곁에서 자식 교육열에 헌신하신 어머니는. 닭이며 돼지를 키우고 육성회비 철이면 장마당까지 다니셨다. 전원일기 최불암이 연상되는 박회장님댁 엄마는 내 구차스럽고 상처투성이 유년의 아름답고 처연한 눈동자였다. 내가 나를 살지 못하고 나를 삼가는 행동이 습관이 되어 버린 이유는 엄마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이었다.

가끔 이유도 모른 채 적당히 서럽고 쓸쓸할 때면 내 안에서 날 연민하는 엄마의 눈동자를 만난다. 어느덧 내가 어머니가 나이가 되어서 어머니 눈으로 세상을 읽으면, 자식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유난하셨던 까마득히 공허했을 엄마를 만난다.

그 시절은 세상이 무섭도록 빠르게 변하던 1960~ 1980년이었다. 서당 선생님이 계시던 가정에서 양반 선비 따지며 삼종지도와 삼강오륜만 귀때기가 닳도록 듣고 사는 것만으로도 언니들은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당연히 튕겨 나가는 게 정상일 테니 나처럼 매사 어른들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일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이제 와서야 왜 나를 살지 못했냐며 후회하기엔 늦었는지도 모른다. 선택과 용기와 반항은 늘 곁에 있었으니 선택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면서 내 탓이 아니다. 다만 내 위로 언니 둘의 가출이란 혁명을 생각하면 난 참 바보처럼 내 뜻을 살지 못했다.

똑같은 환경, 18세기로 뒤처진 가정에서도 자유로운 의사결정으로 똑 부러지게 자기를 살아 온, 그 옛날 두 언니가 막무가내 가출로 얻어낸 가치는, 돌아볼수록 내 생애 가장 부러운 일이 되었다.

아무려나 어차피 삶은 녹록지 않은 것, 모태솔로인 내가 부모님이 안겨주신 중매가 아니라면 결혼이나 했을까 생각이 들고, 딸 다섯이 시대를 거스른 18세기 구식집안에 태어나 문화적으로 핀 진 날들을 적자면,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 못지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봄이 지천이다. 핸드폰을 열어 여전히 이쁘고 새침한 언니 목소리나 들어야겠다. 언니랑 꽃그늘에서 꽃비라도 맞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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