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송보영 수필가

[동양일보]무아의 경지에 들었는가. 그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넓은 모래사장에서 맨발인 채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일렁인다. 자유 의지가 아닌 어떤 이끌림에 의해 리듬을 타는 듯하면서도 절제된 동작을 통해 빚어지는 수많은 언어의 물결이 백사장에 흩어지고 있다. 발끝에 닿을 듯 말 듯 밀려왔다 부서져 내리는 파도를 타고 넘실거린다. 그녀는 반 시진은 족히 될 것 같은 시간을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의 춤사위에서 생의 터널을 휘도는 환희와 눈물, 고뇌의 곡진한 소리 들이 들리는 듯했다. 한바탕 춤사위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냈는가. 여인은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고 망토 자락으로 몸을 감싼 뒤 서서히 사라져갔다.

봄의 초입.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날, 온몸으로 말하는 그의 이야기에 몰입되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의 아픔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게 다가와 격렬한 언어로 슬픔의 농도를 더하게 했는가 하면, 여린 몸짓으로 살포시 보듬어 주기도 하며 내 안을 휘돌았다.

때로는 몸으로 하는 말이 어떤 말보다 더욱 절실할 때가 있다. 세상을 향해 첫울음을 우는 것으로 존재를 알리는 아기들은 오직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의사표시를 한다. 꼼지락거리는 몸짓만 봐도 엄마는 아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듣는다. 아기가 배가 고픈지 알기 위해 입 주변에 손가락을 대보고 손가락이 있는 쪽으로 입이 움직이면 배가 고프다는 신호로 알고 엄마는 젖을 물린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교감이다.

퇴근길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가는 이들을 볼 때면 고뇌하면서도 기대하며 묵묵히 삶의 길을 가고 있을 거라 싶어 숙연해진다. 저녁 어스름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노인의 굽은 등에서 그의 지난했을 삶의 모습이 느껴져 안타깝다.

해거름이 훨씬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옻 자락에는 분필 가루가 묻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의 인지와 중지 사이에는 굳은살이 깊이 박여 있었고 굳은살 때문에 두 손가락이 가지런히 모이지 않았다. 그가 평생을 두고 마셨을 분필 가루 분진과 손가락의 굳은살은 밥의 근원이다.

무심코 들려오는 악기의 선율에 걸음을 멈춘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연주자의 손길에서 탄생 되는 음률은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듣는 이의 가슴에 반향을 일으킨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쉼이 된다. 고흐의 구두는 말한다. 불후의 명작을 남겼으면서도, 인정받지 못해 갈등했던 날들에 대해, 살아 숨 쉬는 자연을 화폭에 담기 위해 산과 들을 누볐던 날에 관하여, 삶의 길목에서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청에 시달리며 방황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가 되어 빚어내는 음률, 화가의 붓끝에서 탄생하는 한 점의 그림에도 생명력이 있어 만나는 이들과 교감하는 것이다.

봄은 봄 나름대로 봄의 본질인 싹 틔움과 눈부시게 피어나는 다채로운 빛깔을 통해 빛나는 언어를 탄생시킨다. 여름은 성숙의 함성으로 충만하다. 온 산야는 뜨거운 햇살과 모진 비바람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며 몸피를 불려 가느라 토해내는 거친 언어들로 시끄럽다. 가을의 이야기는 옹골차다. 봄여름이 키워 낸 풋것들을 여물게 하느라 분주하다. 겨울의 소리는 비장하다. 설한풍을 견뎌 내려면 몸 안에 최소한의 수분만 남기고 가벼워져야 하기에 겨울이 토해내는 이야기는 메마르다.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며 철 따라 빚어내는 온갖 것들이 이야기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형체 없이 왔다 가는 바람도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과 부딪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 소리의 강도와 느낌으로 알아듣고 반응한다. 둥지를 보수하고 몸단장을 시작하는 새들을 보면 짝짓기할 때가 되었나보다 알아차린다.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옷자락에 이는 바람만으로도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가늠한다. 세상에는 말로 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숱한 언어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소리에 화답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인지도 모른다.

그녀와 나는 일면식도 없고 그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교감했다. 어떤 대화보다 절실했고 내 안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움직임에는 다채로운 빛깔의 언어가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온몸으로 토해내는 언어의 물결이 1.3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회색빛의 내 뇌를, 그것도 점차 탄력을 잃어가는 뇌를 쉼 없이 건드렸다. 그와 더불어 몸이 들려주는 언어의 바다를 유영하며 생각한다. 내 몸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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