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용 수필가

김향용 수필가

[동양일보]사위가 회사에 첫 출근을 했다. 그날 종일 내 가슴에는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사위는 결혼하고 일 년 지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직 세무사 자격증 공부를 해 보고 싶다고 의논하였다. 그때, 나는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하라고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러부터 4년. 하던 공부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일 년을 다른 직종을 공부해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차, 지인의 소개로 중소기업인 한 회사에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벌써 올해 사위 나이도 마흔을 넘기고 있으니 서른 살의 청춘은 오롯이 공부에만 올 인한 셈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집에서 혼자 그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마음도 몸도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오죽하면 ‘책도 보기 싫다’고 했을까? 한편으로 중간에 포기도 했을 법도 한데, 그래도 무던히 참고 잘 견디어 낸 사위가 대견했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직장에 다녔으면 하는 가족들의 간절함이 현실로 이루어지니 이것이 행복이구나 싶다.

큰딸한테 전화를 했다. “우리 딸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어, 지금까지 말없이 큰 소리 내지 않고 옆에서 내조 잘한 덕분이야”라고 하자 울먹인다. “엄마 감사해요.” “나한테 감사하긴, 모두 들 열심히 살아 온 덕분이야.” 그동안 내가 사위한테 해 준 것은, 사위 용돈은 내가 준다는 약속을 지켰으니 말은 안 해도 딸도 마음으로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딸하고 사위 앞에서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출근하려면 옷도 여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 함께 서울에 간 김에 점심 먹고 백화점 남성복매장에 구경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지 않아도 오빠 여름 바지만 이어서 사려던 참인데 잘 되었네” 하며 딸은 반가운 기색이다. 매장은 계절이 바뀌는 시즌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딸은 신바람이 나서 이것저것 골라 코디하기에 바빴다. “오빠 이거 입어봐, 바지랑 티셔츠 자켓도.”신발까지 사주고 나니 큰 재산을 장만해 준 기분이다. 사위랑 딸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인 은행에 출근케 되자 작은 시골 마을에서 딸이 은행에 취직한 것이 아버지에게는 큰 자랑이셨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충주 자유시장으로 가셨다. 밤색 핸드백 하나를 골라 주셨고, 구두는 검정색 단화를 신어 보라고 하셨다. 옷은 직물 점에 가서 옷감을 사서 양장점에 갖다 주고 맞추는 것이 값이 싸다며 정장으로 치마와 자켓을 해 주셨다. 하나는 짙은 회색이고, 또 하나는 짙은 감청색이었다. 아버지는 들르는 상점마다 ‘우리 딸이 은행원이 되었노라’ 자랑을 하시던 모습이 차창 너머로 어제 인 듯 나타났다. 며칠 후 옷을 찾았다. 처음 입어보는 투피스였다. 몸에 꼭 맞는 맞춤옷도 신기 했지만 거울 속에 나타난 나는 딴사람만 같았다. 거울 앞에 서서 요리조리 살펴보며 가슴이 한없이 콩닥거렸다. 그날 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현란한 무지갯빛이어서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세월은 많이 흘러 아버지는 세상에 안 계시지만, 두고두고 내 마음속 사랑의 옹달샘이 메마르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끝이 없는 인생 이어달리기에 아버지가 주신 바톤을 놓치지 않고 사위에게 넘겨줄 수 있는 오늘이 마냥 감사하다.

아, 헤아려 보니 ‘어버이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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