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

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

[동양일보]그리스의 한 왕은 전장으로 떠나면서 자신의 아들을 친구에게 잘 보살펴 달라 부탁하였다. 친구는 그 아들의 선생 역할, 친구 역할, 부모 역할, 때때로 상담자의 역할을 잘 해 주어 약속을 지켰다. 친구의 이름은 ‘멘토’였고, 멘토는 이후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의 의미가 되었다.

나의 삶에 멘토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바른길을 향해서 “물러서지 않는 산” 이셨던 스승은 더러 더러 훅 마음속에 들어와 잔잔한 파문을 만들고 가셨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스승를 조우한 나의 마음은 기쁘기 그지 없었다. 나는 평소 스승의 그 태산 같은 안정감을 동경 하였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때 연구차 지방으로 자주 왕래한 적이 있었다. 많은 경우 나는 선생님과 동행하였다. 그때 항상 옆좌석에 앉아 간 나는 운전을 하고 계신 선생님과의 대화가 지금까지도 가장 즐겁고 유익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화제는 다양하여 학문의 방법과 바람직한 태도, 연구에 닥치는 여러 난관과 해결, 열린 마음과 난관을 피하지 않는 마음 가짐의 중요성 등등 기본적인 수양을 어렵지 않은 말로 쉽게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한마디로, 전향적인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주신 것이 이때의 교훈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스승께 야단을 맞아 본 내 동료 문하생이라면 공통적으로 느꼈을 터인데, 그것은 야단 맞은 후의 기분이 이상 스럽게도 꼭 나쁘지 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과거 공부하며 같이 지냈던 이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맛 보았던 그 희귀한 경험은 나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제자를 위한 진지한 충고였고 말씀에 항상 사랑이 같이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리시는 대인의 일면 또한 있었다. 이제 여러 제자를 두고 이들에 조언하고 도움을 주는 입장에 서보니 그 깊은 사랑을 흉내내기조차 쉽지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스승과 독립하여 때때로 어려움을 느낄 때, 애를 쓰고 써도 좀처럼 방도가 떠오르지 않을 때 늘 효과를 발휘 했던 나의 한가지 방법은 많은 경우 효과가 있었다. 이일을 누구 누구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스스로 묻는 것이었는데 그 가상인물은 많은 경우 나의 스승이었다. 그렇게 얻은 방안에 스스로의 용기를 덧대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내게는 또 하나의 멘토가 있다. 그와의 어느 하루가 생각난다. 학문의 선배였는데, 서울에서 학술 집담회를 하고 나서 청주까지 일부러 운전하여 태워 다 주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여도 그 것이 한밤에 그리 쉬운 친절 이었겠는지. 거듭된 사양에도 한사코 그렇게 고집하고, 결국 그렇게 하고는 되돌아 갔다.

그 이후로 가끔 댁에 놀러 갈 때가 있었는데 대개 약주 한 잔을 하였다. 대화의 내용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었다. 선배는 당시 시를 쓰면서 온갖 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시에도 나오는 목련, 개망초, 인동초, 에델바이스, 안개꽃, 철쭉, 비비추... 그는 술 마실 때에도 꽃 이야기를 하였지 누구를 험담 하는 따위의 그런 일은 없었다.

사모님은 부창부수, 새 이야기로 화답하셨다. 당시 길동생태공원 생태해설 활동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배는 상당히 꼼꼼하여 학회장 시절에는 전 학회원 에 일일이 손편지로 인사말을 쓰셨다. 연필로 썼는데 한자 한자 정성을 들여서 쓴 카드 편지였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매우 특별한 느낌을 가졌는데 더러 회비 납부를 독려할 때에도 그렇게 하여 보냈다. 그 편지를 받게 되면 "아, 이렇게 성의있는 우리 회장 이시구나. 회비를 얼른 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도 얼른 학회비를 납부 하였었다.

그가 더러 나를 잊으셨나 내가 그를 잊었나 한동안 지나 가물가물할 즈음이면 예고도 없이 불쑥 들러 저녁을 사주었다. 당시 수일 전 어느 자리에선가 나의 스승으로 부터 잘 있다는 안부를 들어서 기분이 좋았노라고… 그는 격려의 멘토였다.

나를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하여 주신 그 분께 한번 맛 있는 음식을 사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아무런 약속 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가.. 하지만 그는 애석하게도 아까운 생을 이미 마감하신 분이다.

오늘, 그가 오랜만에 찾아와 내 마음의 물가에 조약돌을 하나 던지고 갔다.

“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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