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택 전 제천교육장

최성택 전 제천교육장

[동양일보]세상인심이 조석으로 변하는 요즈음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말이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는 뜻이다. 세한(歲寒)은 혹독한 추위를 뜻하는 말로 혼란한 세상, 곤궁한 처지를 비유하고, 송백(松柏)은 한 겨울의 눈바람과 서리를 이겨내고 푸름을 유지하는 절조의 상징을 이른다. 줄여서 ‘세한지송백(歲寒知松柏)’ ‘세한송백(歲寒松柏)’이라고도 하며 올곧은 절개와 굳은 지조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송백지절(松柏之節)’ ‘설중송백(雪中松柏)’ 또는 ‘낙락장송(落落長松)’ 등이 있다. 이 말의 출전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구절로 추사 김정희도 어려울 때 인간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으며 이런 생각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이다.

김정희(1786~1856)의 증조부 김 한신은 조선21대 임금 영조의 사위로 김정희는 요즈음 말로 하면 금 수저 출신으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고 자랐다. 24살에는 청나라 파견 사절단의 부사(副使)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옴으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조선 최고의 학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추사가 45세 되던 해 부친 김노경이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 되었고 그 후 10년이 지나서는 자신마저 조선 헌종 시절 옥사에 연류 되어 제주도 대정현 으로 귀양 가 9년간 위리안치(圍籬安置-집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유배)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가장 친한 친구 김유근이 사망하고 반대파들의 박해도 끊이지 않았으며 친한 친구들의 소식도 점차 끊어지자 김정희는 오직 책을 벗 삼아 지내는 외로운 생활이었다. 그런 김정희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은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었다.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구하기 힘든 최신의 서적을 구해 김정희께 보내주었다. 한 번은 연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이란 책을 구해다 보내 주었다.

이 외에도 ‘만학집’ ‘대운산방집’ 등을 부쳐 주었는데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가 보장 되었을 텐데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이때 김정희는 논어 자한(子罕)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는 의미이다. 공자가 겨울이 되어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김정희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사람 됨됨이와 인간관계를 깨닫게 되었다. 김정희는 이상적을 공자가 생각한 송백(松柏)과 같은 사람임을 깨닫고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으나 지금의 자기 형편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김정희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송나라 소동파가 그린 「언송도(偃松圖)」라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 되었을 때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해 그 먼 곳까지 찾아 왔다. 어린 아들의 방문에 너무도 기뻤던 소동파는 아들을 위해 「언송도」라는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아들을 위해 칭찬하는 글을 썼다.

이상적이 보내준 책을 받아든 김정희는 혜주로 유배 된 소동파와 제주도로 유배 된 자신의 상황 그리고 소동파를 위로하기 위해 멀리 찾아온 어린 아들의 마음과 멀리서 어렵게 책을 구해다 준 이상적의 의리를 생각하며 소동파가「언송도」를 그렸듯, 김정희는 자신만의「언송도」를 그리기로 했다. 김정희는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 나갔다. 창문 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한 채, 앙상한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을 매달고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잣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또 다른 종이 위에 칸을 치고 글씨를 써 내려갔다. 겨울에도 늘 푸른 송백에 비유해서 이상적의 의리를 칭찬한 글이다. 그림을 마친 김정희는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이상적의 호)은 감상하시게)’ 이라 쓰고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김정희를 감동시킨 그 의리와 절개를 그린 세한도는 조선 지식인의 핏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고난 극복과 푸르름을 지켜낸 절조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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