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우리에게 오월은 연두가 짙푸름으로 변해가는 초록의 시간이지만, 그 초록 속에 담긴 만행의 역사를 떠올려야 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어느새 40여 전 이야기가 된 ‘광주’는 핏빛 기억으로 되살아나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위한 좌표가 되어준다. 그런 점에서 광주는 우리에게 비극임과 동시에 자부심이고, 소중한 삶의 지표이기도 하다.

올해는 그 오월의 끝에 ‘부처님 오신 날’이 있다. 대체공휴일까지 지정되어 3일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여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깊이 쉴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다 행복하라.’는 부처의 축복이 사람들은 물론 짐승이나 풀 같은 존재자들에게도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 전세 사기를 당해 망연해하는 눈빛들과 우울한 마음을 나누고자 들어간 가상공간의 방에서 더 큰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젊음들이 있다. 거기에 자기 봉급만 빼놓고는 다 오른다는 지속적인 물가 상승과 대출이자율 등이 겹치며 우리 삶에 주름살을 더하고 있다. 고통을 받는 사람이 나 자신일 수도 있고 형제자매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떤 식으로 내게 다가올지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해내는 압축성장의 과정을 공유한 우리 사회에는 그 고통에 더해 남북분단으로 인한 전쟁의 상시적인 위험과 그것에 기생하여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사코 거부하는 자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고통이 있다. 지속적으로 광주와 관련된 유언비어를 공개적으로 퍼트리는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있고,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조금만 달라도 곧바로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다. 특정 정치인을 일방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른바 ‘팬덤정치’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기준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윤리를 말할 수 있다는, 윤리학의 기본명제마저 쉽게 망각하게 한다.

거대양당 사이의 적대적인 공생이 불러온 혐오와 배제의 정치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정의를 중심에 두면서도 때로 현실적 타협도 이루어내야 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정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제대로 된 정치가 없는 셈이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비방과 자기편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이다. 최소한의 시민의식조차 갖추지 못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고통은 이미 충분하게 넘친다. 더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 중 상당수가 ‘많이 배운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부처가 이 땅에 와서 펼친 가르침은 깊고 푸르지만,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은 중도(中道)이다. 중도는 적당히 중간 입장을 취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를 번역한 한자어인 도(道)에 끊임없이 다가서려는 노력이자 자세가 바로 중도이다. 다르마나 도가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 일상 속에 이미 들어와 있어 관심을 갖고 성찰하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을 강조하고자 부처는 중도를 팔정도(八正道)라는 구체적인 실천지침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팔정도는 일상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로 보고자 하는 정견(正見)에서 시작해서 바른 말과 바른 직업, 바른 생각, 바른 정진 등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가 자신의 삶과 현실정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고통은 나 자신의 업(業), 즉 내가 그동안 생각하고 해온 일들의 결과임과 동시에, 우리 한국인들이 지난 100여 년 동안 함께 살며 성취해낸 일들에서 비롯되는 공동의 책임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공업(共業)이라고 하는데, 현재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 꼭 유념해야만 하는 지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특정 개인의 몫이거나 책임인 것으로 돌려놓고 비난하는 행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편협한 생각 때문에 차가운 눈빛을 보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고 싶어지는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그 성찰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의 고통을 줄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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