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동양일보]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낯설고 불안한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기업들은 정치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는 평평하기 때문에(Falt World) 눈에 거슬리지 않는 국경에 개의치 않고 오직 기술과 비즈니스에만 집중하면 될 뿐이었다. 실력만으로 승부가 되는 세상은 대한민국에 최대의 축복이자 기회였다. 그런데 지금은 부드럽게 이어지던 무역과 돈의 흐름이 곳곳에서 끊기고 새로운 장벽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활동에 지정학이라는 지도가 더해지면서 이념과 가치, 세력권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출현한다. 통합되었던 세계는 다시 블록으로 분할되고 장벽이 세워진다. 국가 간에 경제와 안보 면에서 새로운 짝짓기가 유행이다. 세계는 더 이상 평평하지 않다.

이런 분할이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세계화 기간에 국가 간에는 복잡한 공급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었다. 이런 연결을 인위적으로 끊는다는 것은 뼈와 살이 분리되는 아픔이다. 무역수지가 14개월째 적자에다가 대중국 무역액이 지난해 대비 26% 감소했다는 소식은 초현실적이다. 작년 초만 해도 이런 일이 발생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추세가 올해 하반기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무역 부진으로 올해 세수 결손이 38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어려운 재정 상황에서 중앙정부의 지방 교부금이 중단될 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나오는 실정이다.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들은 자신들이 규칙을 정하기 때문에 공급망 재편의 속도를 조절하고 불안에도 대비할 수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 2016년에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사드 배치로 인한 보복을 당했을 때 미국은 우리의 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호주가 중국으로부터 와인과 석탄 수출을 봉쇄당했을 때도 미국은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반면 최근 미국의 마이크론이 중국으로부터 반도체 수출을 금지당하자 우리더러 중국에 반도체를 팔지 말라며 공동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아픔에는 우리가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고 우리의 아픔은 우리 혼자 대응해야 하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도 정부는 미국에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거센 지정학의 파도에 외로운 깃대처럼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처지를 이해해 줄 나라는 없다. 스스로 규칙을 정하지 못하고 원칙과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동맹에 의존하는 나라는 양쪽에서 뺨을 맞을 판이다. 지금과 같은 공급망 분리를 일찍부터 대비한 일본은 오히려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준비도 없이 이 불안한 도박판에 끼어들고 말았는데, 자칫하면 판돈을 다 잃고 거덜 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큰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동맹이 제공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일종의 주술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일본이 고안한 이 전략에 정작 인도는 참여하지도 않고 러시아와 협력하는 일탈된 행동을 보인다. 한마디로 인도가 없는 인도-태평양 전략이다. 그런데 대륙과 긴밀히 연결된 대한민국이 엉뚱하게 섬나라의 생존전략에 편승한 것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줄 모르는 나라의 지나친 의존심리의 발로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집권 초부터 “탈중국”을 외치던 권력자들이 무책임하게 벌여놓은 도박판에 우리는 언제까지 가슴을 졸여야 하나. 미국과 일본의 압력이 거셀수록 우리는 강인한 생존 의지로 우리의 원칙과 기준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땀으로 이룬 기술과 시장을 결연하게 수호하겠다는 선언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런 의지가 있다고 해서 동맹이 우리더러 섭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게 바로 원칙이다. 사고와 철학이 박약한 위정자들이 이 어려움의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는 지금이 바로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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