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묵 시인

최은묵 시인

[동양일보]집에 있는 물건 중에서 버려야 할 것을 골라낸다. 재활용이 가능한 것은 종류별로 나누고 다시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은 쓰레기봉투에 담아도 여전히 집안에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많다. 버리기엔 아깝고 그대로 두자니 거추장스러운 것들부터 어떤 기억이 담긴 것들까지, 오늘도 손이 닿는 곳곳마다 멈칫거리게 하는 순간과 마주한다. 성적표나 합격통지서 또는 일기나 편지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들도 있고, 관광지나 행사장에 다녀온 기념으로 간직한 것들도 적지 않다. 이런 작고 소소한 것들이 지닌 흔적은 의외로 또렷해서 나는 버리는 일을 멈추고 잠시 추억에 빠져들기도 한다.

표면이 아닌 내면의 가치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망설임은 대개 이럴 때 작동한다. 타인이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건일지라도 당사자에겐 떼어내기 어려울 만큼 소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모 시인에게 연락이 왔다. 이야기의 핵심은, 본인이 출간한 첫 시집이 헌책방에 팔리고 있는 게 속상해서 구입을 했는데, 펼쳐보니 누군가에게 직접 보낸 책이었다고 했다. 속지에 받는 사람과 본인의 사인이 그대로 남겨진 책을 보고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라는 말도 남겼다.

생각난 김에 나도 책장에 꽂힌 책을 한 권씩 천천히 꺼내 보았다. 속지에 적힌 사인과 이름마다 꾹꾹 눌러 담은 마음처럼 세상에는 겉에 찍힌 가격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

가만히 집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에 보이는 사물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직접 샀거나, 선물로 받거나, 부모님의 유품처럼 삶이 통째로 담긴 것도 있다. 그러니 버린다는 건 단순히 어떤 물건을 치우는 행위가 아니라 물건에 담긴 어떤 의미를 떼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 망설임은 당연하다. 의미에는 분명 사람의 관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무감각하게 지내다가 낡고 헤지고 닳고 변하고 불용의 존재로 머물다 버려지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들여다보는 마음처럼 우리는 익숙한 일상에서 곁을 자주 잊고 살아간다.

삶은 채우고 비우는 반복이다. 살아가며 쌓인 의미를 모두 지닌 채 또 하루를 걸어가는 건 버겁다. 그러니 버리는 일도 중요하다. 어떻게 버려야 할까? 나는 의미가 적은 것들부터 골라 담는다. 이젠 그만 그 자리를 비워도 서운함이 적을, 타인의 관계보다 나로부터 형성된 의미들이 우선이다. 모 시인의 첫 시집을 내팽개친 누군가처럼 관계를 함부로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조금 더 망설일 생각이다.

잘 버린다는 건 잘 채우기 위한 준비다. 우리에겐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날이 많다. 채우기에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버림을 통해 이전을 돌아보는 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기억으로만 간직해도 괜찮을 나의 지난 시간과 편안한 작별을 준비한다. 이런 과정에서 타인의 마음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건 미안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치고 머물고 떠나는 동안 서로가 나눈 숱한 마음들. 그런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버린다고 하지 말고 보낸다고 바꿔 말해보는 건 어떨까. 겉모습이 그저 그런 물건일지라도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조금이라도 담겨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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