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의 수문장, 오래된 미래를 걷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에세이스트

 
성안길은 젊음의 거리·문화의 거리이다.
성안길은 젊음의 거리·문화의 거리이다.

 

[동양일보]서원 땅 아름다워 풍광이 좋고

벽에 걸린 사람들 모두 유명하다네

성은 호수와 산을 억누르며 아래의 땅을 굽어보고

나라의 큰 고을로 중앙에 위치했네

가을하늘 높아 들판은 광활하여 하늘에 맞닿은 듯

해 저물자 먼 산은 오래도록 새를 불러오네

읍성을 둘러싼 구름과 연기 오랜데

오래된 느티나무 성긴 버드나무는 천 길이나 되었네

 

1910년 성안길.
1910년 성안길.

 

조선의 유학자 김정(金淨)은 청주읍성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임동철 충북대학교 전 총장이 그의 시를 번역했는데 읍성에 올라 굽어보면 푸른 산과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무심천에는 느티나무와 버드나무가 가득했다. 사계절 아름답고 풍광이 빼어나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오랫동안 국토의 중심에서 자연(구름)과 사람(연기)이 함께 손잡고 정겹게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주읍성의 역사는 서원경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이 설치됐다.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의 행정조직을 새롭게 개편했는데 동·서·남·북과 중앙의 방향에 맞추어 5소경을 두었다. 북원소경(원주), 금관소경(김해), 중원소경(충주), 그리고 청주에 서원소경을 두었다. 이때 서라벌과 같은 도시체계를 갖추기 위해 대규모 토목사업이 전개되었다. 신문왕 9년(689)에 서원경성을 쌓은 것이다.

복원된 청주읍성.
복원된 청주읍성.

 

역사학자들은 서원경성이 곧 청주읍성이라고 말한다. 청주읍성은 둘레가 1640m, 높이가 4m에 달한다. 읍성의 구조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인데 남문에서 북문으로 큰 길이 직선으로 뚫려 있고 동문과 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성 밖의 동쪽에는 우암산이 우뚝 솟아 있고, 서쪽에는 무심천이 흐른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읍성의 도로망은 방격(方格)으로 뚫렸으니 계획된 도시임이 틀림없다.

옛 청주읍성 청남문.
옛 청주읍성 청남문.

 

청주읍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청남문(淸南門.남문), 벽인문(闢寅門.동문), 청추문(淸秋門.서문), 현무문(玄武門.북문)이다. 이 중 청남문의 위용이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청주약국 근처에 있었는데 무사석으로 기단을 쌓아 올렸고 출입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팔작집 모양의 2층 누각에는 '淸南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람들이 무지개 성문을 들어가고 나온다. 2층 누각에서는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한유롭다.

조선 정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읍성도를 보면 당시의 읍성 위치와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청남문에서 우리은행 쪽으로 직진하다 왼쪽으로 꺾으면 충청병마절도사영문을 통과해 충청병영에 이르게 된다. 충청병영은 당초 충남 해미읍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후 이전됐다. 해로(海路)보다 육로(陸路)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국방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청주동헌, 망선루 등 지방행정을 이끈 주요 시설이 배치돼 있었다. 이곳에서 국가와 지방의 행정을 잇고, 사람과 문화를 잇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고 담고 품으며 살아왔다.

아쉽게도 청주읍성은 일제의 침략과 함께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일제는 1911~1914년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읍성을 헐어 하수구 개축에 사용했다. 도시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저질러진 만행이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일제와 싸운 육전 최고의 승전지가 아니던가. 그들은 의병, 승병에게 패퇴한 것에 대한 앙갚음의 심리 때문인지 전국의 읍성 중에서 제일 먼저, 청주읍성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렸다. 천오백 년 청주의 수문장이었던 읍성이 사라졌으니 그 쓸쓸함과 아픔은 말해 무엇하랴.

공간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사랑을 낳는다고 했다. 청주읍성은 일본식 이름인 본정통으로 불리다가 1993년 청주문화사랑모임의 명칭 변경 시민 공모를 통해 성안길로 부르기 시작했다. ‘청주읍성의 안쪽 길’이라는 뜻이다. 성안길은 성곽이 헐리고 남루한 세월을 보냈지만 지금도 청주 역사의 중심, 문화의 중심, 상권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과거에는 ‘작은 한양’이었고, 지금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젊음이 공존하는 ‘오래된 미래’다.

청주 국보 제 41호 용두사지철당간
청주 국보 제 41호 용두사지철당간

 

성안길의 랜드마크는 단연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철당간은 서기 962년, 준풍(峻豐) 3년에 만들어졌다. 준풍은 고려 광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시기를 스스로 만들어 표시한 독자 연호다. 청주 일대에 고약한 돌림병이 돌았다. 화평의 시대를 꿈꾸었던 청주 김씨 일가는 이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과 머리를 맞댔다. 청주의 지세가 떠나가는 배 형국인데, 배가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돛대를 달아야 하지 않는가. 돛대가 없으니 역병이 창궐하고 민심이 흉흉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돛대를 세우기로 했다. 청주와 인근의 가가호호에서 쓰지 않는 연장을 모았다. 특히 전쟁에 사용했던 무기류를 제 다 모았다.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위해서다.

이렇게 모은 철제기구를 녹여 당간을 만들고 용두사 입구에 세웠다. 높이는 30단 60자, 그러니까 18m나 되었으니 읍성 일대에서 가장 높았다. 고려시대 청주에 세워진 최고층 빌딩이다. 맨 끝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얹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당간의 용머리에서 굽어보는 청주의 비경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선비 박노중(朴魯重)은 ‘쇠막대처럼 곧은 것이 뜰 위에 떠 있는 듯하다’고 했다.

성안길은 젊음의 거리, 문화의 거리다. 청춘 남녀의 데이트 장소이고 우정을 나누며 추억을 만드는 곳이다. 크고 작은 공연과 전시회 등의 문화활동을 하는 곳이다. 청년들과 예술인의 동아리 활동을 할 때도 성안길에서 모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등의 시험을 본 뒤, 졸업식 뒤풀이나 생일 등의 이벤트를 즐길 때도 이곳을 찾았다. 철당간과 130년 전통의 청주우체국이 만남의 장소였다.

청주읍성축제 성탈환재현 행사.
청주읍성축제 성탈환재현 행사.

 

성안길은 맛남의 거리, 추억의 거리다. 맛을 지키며 가업을 잇는 공원당, 대를 이은 정성으로 튀긴 청송통닭, 전통 조선식 육수를 고집하는 조선면옥, 청주만의 비법과 맛을 자랑하는 호떡과 만두 등의 디저트 음식이 입소문을 타고 문전성시다. 웨딩거리, 가구거리, 한복거리, 삼겹살거리도 성업 중이다. 디저트 카페, 브런치 레스토랑 등 젊은이의 취향 저격 음식점이 즐비하다. 청주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안길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청주읍성도.
청주읍성도.

 

소망하건대 청주읍성 한 바퀴를 디자인과 미디어아트로 복원하면 좋겠다. 이름하여 포인트 디자인 기법과 디지털의 융합으로 말이다. 4대문 중 청남문이라도 복원하면 어떨까. 이곳이야말로 1500년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시민과 세상 사람들이 공감토록 말이다. 그리고 성안길의 골목길마다 맛과 멋과 풍류가 깃들면 좋겠다. 나는 이곳에서 청주정신이 깃든 문화의 심장소리를 듣고 싶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