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문인협회 김미경

[동양일보 김진식 기자]텅 빈 놀이터에 생기를 불어넣듯 시끌벅적이다. 설을 맞아 본가에 모인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한층 정겹게 들리는 오후다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여서일까 내 마음도 들떠있다. 잠시 후 황급히 문이 열리고 생각지도 않던 뜻밖의 손님이 등장한다. 언뜻 보기엔 너구리인지 강아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뭔가를 안고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서 있다. 온 가족이 놀라며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눈 쌓인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틈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까지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이 녀석이 어떻게 해서 놀이터로 오게 되었는지, 잃어버린 주인은 또 얼마나 애가 탈까.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어찌됐건 날은 어두워졌고 눈발도 날리는데 녀석 혼자 놀이터에 덩그러니 남겨놓고 차마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원치 않는 동거는 시작되었다. 헐레벌떡 전용 샴푸를 사오고 사료며 목줄이며 장난감 오리도 사 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맞이에 온 가족이 동원되었다. 따뜻한 거품 목욕을 하고 거실 한켠에 방석을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더니 금세 단잠에 빠졌다.

이튿날 아침 눈도 뜨기 전에 엄습해오는 불길한 예감에 급히 거실로 나와보니 뽀송뽀송한 꿀 잠 잔 모습으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안긴다. 여기저기 볼 일을 봐 놓고 방석이며 휴지케이스, 콘센트 어느 것 하나 성한 게 없을 거란 생각은 기우였다. 서둘러 목줄을 채워서 공터로 데리고 나왔다. 그제서야 밤새 참고 또 참았던 볼 일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아닌가. 왜 그리 이쁘고 고맙기까지 한 것인지.. 너무도 예의 바른 녀석의 매력에 그만 푹 빠져들고 말았다. 하룻밤 사이 이미 우리는 끈끈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가족이 되었으니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전에 키우다 별이 된 애플, 입양 보낸 망고, 또 밍크, 초코, 밀크 등등 떠올리다 설날에 오신 손님이기에 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설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 원장님께서는 유기견센터에 먼저 신고를 하고 주인이 나타나 지 않으면 일정 기간 보호했다가 안락사하는 절차가 있다고 조언해주셨다. 셔퍼트+말라뮤트 믹스견으로 “시고르 자브종” 이라고 하셨는데 ‘시골 잡종’의 우아한 표현이라고 하셔서 설이를 보여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다. 설이도 따라 웃었다. 암컷이며 6㎏, 특이사항 : 건강함. 애석하게도 주인이 있음을 알려주는 칩은 없었다. 다행히 심장사상충은 감염되지 않았고 대신 구충제 처방을 받아왔다.

이윽고 설 연휴가 지나고 증평 유기견센터와 연결이 되었다. 발견날짜 : 설날, 발견 장소 : 놀이터. 전화기 너머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센터에 계신 분이 트럭을 가지고 오셨다. 이미 설이는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아이들 핸드폰엔 온통 설이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설이에겐 최상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시엔 안락사라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고 있던 설이를 인계하면서 말없이 간식 봉지와 장난감 오리를 건냈다. 설이가 잠시 머물다 간 자리는 아쉬움과 걱정, 녀석의 샴푸냄새와 그리움이 남았다.

설 연휴 중 별안간 우리에게 와준 소중한 인연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려야 했다. 설이 안부를 묻는 아이들의 전화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유기견센터엔 설이 사진과 목록이 떠있고 아이들은 마음을 졸이며 수시로 검색하면서 설이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을 무렵 드디어 온 가족의 염원이 실현되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두 글자 ‘귀가’. 설이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문구가 사이트에 올라왔다. 우린 모두 기뻐하며 환호했다. 귀가라는 단어를 연호하면서. 설이의 가출 소동은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설이야~ 눈 내리는 날 놀이터에서 만나서 한바탕 뛰고 놀자. 당부하지만 그땐 부디 혼자 나오면 안돼~” 그 후로도 우리에겐 긴 여운을 남기며 설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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