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주필·동화작가

 
제일교회전경
제일교회전경

 

[동양일보]청주제일교회는 육거리 시장 안에 있다. 늘 시끄럽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무게중심을 잡듯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교회의 앞문과 뒷문은 시장으로 이어져 친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시장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엄숙한 위엄이 느껴져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밀러선교사
밀러선교사

 

청주제일교회는 올해로 119년이 되었다. 1904년 밀러(Frederick S. Miller. 한국명 민노아)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회 충청지부 설립을 위한 거점교회로 청주읍교회를 세우면서 시작이 되었다. 한국인 조사인 김흥경 등과 함께 청주읍내를 돌며 전도하다가 읍성 남문 밖에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커다란 초가집을 마련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땅에 묻힌 남석교를 지난 위치였다.

순교지정원.
순교지정원.

 

교회가 문을 열던 1904년은 일제가 한국과 병합을 앞두고 내정간섭을 하던 시기였다. 청년들은 울분에 차 있었다. 암울한 시기, 민족애로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는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교인이 늘자 초가집으로는 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교인들은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남문 바로 바깥쪽에 부지를 마련하였고, 1905년 그곳에 한옥 기와집 예배당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바로 현재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13번길 15(남문로1가 154번지)일대의 지역이다.

청주읍교회는 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증축하였으나 한계가 있어 1913년 목조예배당을 지었다. 이후 1939년 고딕식 2층 벽돌 예배당을 짓고 1950년 다시 증축하면서 첨탑 지붕의 중앙 종탑 좌우로 출입구를 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역사와 기록을 중시하는 교회답게 교회 건물에는 1939년과 1950년 2개의 준공 정초석을 남겼다.



●역사적 기념물이 많은 내공깊은 교회

청주제일교회는 한 세기를 넘긴 역사만큼이나 내공이 깊은 교회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교회의 담장 쪽에 조성된 비림(碑林)정원이다. 이곳에는 교회의 역사를 짐작케 하는 기념비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로간부인기념비
로간부인기념비

 

그중 첫손을 꼽는 것은 ‘로간부인기념비(로간부인긔렴비)’이다. 높이 101cm, 너비 38cm, 두께 36cm 크기의 사각뿔형의 이 비석은 충북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비석(1921년 6월1일)으로 지난 5월 청주시로부터 ‘향토유적 165호’로 지정받았다. 로간(Mary L. Logan)부인은 미국 켄터키주 출생으로, 1909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뒤 1919년 지병으로 별세할 때까지 10년간 충북지역 선교와 여성교육에 헌신했다. 그를 잊지 못해 1921년 여신도회서 비를 세웠다.

비림정원에는 2004년 청주제일교회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창립 100주년 기념비’, ‘기독청년·여성·민주화운동 기념비’, ‘여신도회 창립100주년 기념비’가 있고, 밀러관 앞에는 ‘망선루터 기념비’와 ‘창립 100주년기념 밀러관’ 머릿돌이 있다. 그리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가 세운 ‘제 6호 총회유적교회기념비’가 있다.

비림정원을 지나 남문쪽으로 오면 남문 양쪽으로 두 개의 쌈지정원이 눈에 띈다.

민주화운동기념비
민주화운동기념비

 

동쪽엔 이 터가 조선시대 천주교 청주진영순교지였음을 알리는 순교정원이 있고 서쪽엔 민주화공원이 있다. 순교공원엔 복자 오반지 바오로를 중심으로 전 야고보, 김준기 안드레아, 최용운 암브로시오 등 순교자 4인의 얼굴 부조가 벽에 붙어있고 청주의 천주교 순교지 지도와 표지비가 세워져 있다. 부조의 주인공들은 1866년 병인박해때 이곳에서 고문을 받고 처형된 순교자들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던 1866년 태어난 밀러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멀고 먼 한국 땅을 찾아, 이곳 조선시대 청주 영장의 관사와 옥사가 있던 천주교순교지에 교회를 세운 것은 우연일까, 운명이었을까.

1939년 정초석
1939년 정초석

 

서쪽에 있는 민주화공원엔 청주제일교회 출신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24세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바친 최종철 열사의 추모비와 1987년 6.10 항쟁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망선루터
망선루터

 

●육영과 교회와 기독단체의 요람인 망선루

청주제일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망선루의 이전 복원이다. 망선루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원래 이름은 취경루였으며, 지금의 청주시 북문로 1가에 있던 청주객관 동쪽에 있던 2층 누각이었다. 세조7년(1461년) 한명회가 누각의 편액을 망선루라 바꿨으며,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여 왔다. 그런데 1921년 일제가 경찰국 유도장 무덕전 신축을 이유로 망선루를 해체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이에 독립운동가이며 청주청년회 회장이었던 김태희 장로를 중심으로 함태영 목사, 이명구씨 등이 주축이 돼 망선루 보존운동을 펼쳐 1923년 교회 안으로 이건(移建)했다.

창립 100주년 기념비
창립 100주년 기념비

 

이후 교회 안에 자리잡은 망선루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4면이 트인 누각에 벽을 만들고 유리창문을 달아 교육의 장소로 활용했다. 1904년 광남학교로 개교했던 청남초등학교가 이전해 망선루를 교사로 사용하였고, 상당유치원, 청신여학교, 청주간호학교 등이 이곳서 첫교육을 시작했으며, 1949년엔 세광중학교가 1954년에는 세광고등학교가 망선루에서 개교했다. 교실이 좁자, 교회는 예배당 1층을 개조해 교실로 내놓았다.

또 청주 YMCA와 YWCA 등 기독교 단체들이 이곳에서 창립을 했다. 망선루는 이처럼 육영의 장소로 인큐베이팅을 했고, 민족교육운동과 한글강습회 각종 집회 및 강연회 등을 여는 사회운동의 요람으로 그 기능을 다하여 왔다.

이후 망선루는 2000년 중앙공원 내의 현재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고, 망선루가 있던 자리에는 교회 창립자인 밀러 선교사의 이름을 딴 현대식 밀러관(교육관)이 들어섰다.



●지역사회 문제 외면하지 않는 열린 교회

1904년 문을 연 청주제일교회는 구한말-일제강점기-해방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지역사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선도적으로 나섰다. 1913년엔 한국 장로교단 중 최초로 부인전도회를 조직했고, 1919년에는 남자전도회가 조직되면서 3.1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1920년엔 남녀차별을 없애기 위해 예배실의 남녀 좌석을 구분하는 휘장을 철거했다.

해방후 혼란스럽던 1947년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와 함께 반공투쟁을 주도했는가하면, 1987년엔 4·13선언 철회 단식기도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 거국중립내각 수립 및 양심수 석방을 위한 국민대회, 광주사태 규탄대회 등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또한 복음 선교의 주역으로 충북기독교계에서 어머니 교회 역할을 맡아 왔다. 외덕교회(현 우암교회), 덕촌교회, 황청교회(현 상야교회), 제2교회(현 중앙교회), 대전제일교회, 북문교회, 남산교회 등을 개척했고, 그동안 함태영, 구연직, 강신정, 유병찬, 이쾌재, 이건희 등 여섯 명의 목사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으로 뽑혔다. 이는 지방의 교회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청주읍교회가 청주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 데는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1934년 제2교회(현재의 중앙교회)의 분립을 추진하면서 기존교회가 자연스럽게 제일교회가 된 것이다.

종탑에 얽힌 이야기도 귀하게 전해진다. 1939년 교회를 신축할 때 남문로 일대엔 높은 건물이 없었다. 청주시민들은 제일교회가 당간처럼 청주(배모양의 지형)를 지키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건축도중, 일제로부터 높이를 낮추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당시 당산에 일본신사가 있었는데, 신사보다 높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할수없이 종탑높이를 구척을 낮춰지었다. 그리고 100년이 되던 지난 2004년 종탑을 원래 설계도처럼 구척을 더 높여서 다시 준공했다.

‘하늘의 빛, 땅의 소금, 역사의 누룩’이 되길 자처하며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지역사회를 지켜온 청주제일교회는 청주시민이 보듬고 지킬 미래유산으로 그 가치가 있다.

 

이건희 목사
이건희 목사

 

<이건희 담임목사 인터뷰>

이건희 담임목사(65)는 증조부부터 외가까지 포함 6대째 청주제일교회를 다니는 골수 신도이다. 그의 삶에서 단 한순간도 청주제일교회의 시간이 배제된 적이 없다. 20년째 담임목사를 맡고 있지만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은 그가 솔직하고 사고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2017년 가톨릭 교구로부터 작은 표지석 하나만 세워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당회에서 동의를 해서 오석으로 표지석을 하나 세웠어요. 그런데 2021년 서운동 천주교의 김웅렬 신부님이 ‘표지석이 눈에 띄지 않으니 성지 표식을 할 만한 공간을 내줄 수 있느냐’는 연락이 왔어요. 당회에 안건을 올렸더니 모두 흔쾌히 동의를 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 천주교순교지 정원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와 우리교회에서 묵주를 돌리고 갑니다. 재미있죠?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김 신부님과는 형님동생이 되었어요.”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종교의 발상지인 인도에도 15차례 이상을 다녀왔다. 그곳서 만난 무슬림 청년을 아들로 삼았다.

“교회는 이웃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시장 안에 있잖아요. 그래서 시장 노인들을 위해 제일노인가족상담소와 육거리사랑방을 열었어요. 그리고 푸드뱅크 사업도 시작했지요.”

그는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힘들었지만 깨달은 점도 많다. 그는 설교를 잘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설교가 신도들의 가슴에 와닿는 것은 살아있는 생활 속의 이야기를 말씀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2021~22년까지 그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맡게 된 것은 그의 단단한 신앙의 뿌리가 밑받침되었지만 유연한 리더십을 지닌 목회자이기 때문이리라.

밀러관
밀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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