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동양일보]그야말로 찌는듯한 더위와 후텁지근한 장마철이 시작됐다. 이제 시작이니 올여름을 어떻게 나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그런데 무더위와 장마보다 우리를 더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눈만 뜨면 매체를 도배하고 있는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옳다고 우기기라도 하더니 이제는 옳고 그름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고 그저 가장 자극적인 단어만을 내뱉으며 죽기 살기로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다. 참 열심히도 싸운다. 여당도 야당도 또 대통령실도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어 뒤엉켜 있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도 열심히 그리고 처참하게 싸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대한국민은 그저 짜증만 날 뿐이다.

탄핵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암흑기를 거쳐 다시 집권한 현재의 여당은 국정의 파트너로서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함과 동시에 견제의 역할에도 충실해야 함에도 스스로 대통령실의 하부 조직처럼 처신함으로써 정당으로서의 고유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촛불과 탄핵으로 집권에 성공했으나 5년 단임으로 끝나버린 현재의 야당은 절대적 의석에도 불구하고 대안세력으로서의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1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정권을 빼앗긴 분풀이에만 몰두하고 있다.

대통령 또한 이 길만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에 찬 독선으로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여소야대 정국을 헤쳐나가려 하고 있다.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지 않는 거대 야당이라지만 대통령이 야당을 끌어안고 정도를 걷지 않는다면 지금의 독선이 장차 독재로 흘러갈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은 대통령이 이 나라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지, 그러기 위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여당과 야당 그리고 대통령에게 묻는다. 만약 길에서 세 아이가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해 줄 것인가? 각자 맘에 드는 아이를 골라 아주 심한 욕설과 치사한 비방을 가르쳐 싸움을 부추길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일단 싸움을 말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본 후 세 아이가 서로 미안하다 악수하며 화해하도록 할 것 아니겠는가? 우리 국민들도 그러고 싶다. 제발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는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중 간의 패권 경쟁은 그 결말이 어떻든 우리를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만들고 있으며, 산업화 이후 우리의 먹거리였던 자동차와 반도체 등을 넘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않으면 앞으로의 100년을 기약할 수 없다. 여와 야 그리고 대통령실이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인데 허구한 날 싸움질만 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 나라는 정치권 당신들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르고 빠르게 앞으로 끌고 갈 방법을 찾아내라고 믿고 맡긴 것이며, 정치권은 한시라도 당신들에게 부여된 이 임무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정치는 목표도 과정도 그리고 그 결과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상호존중의 정신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에 앞서 당사자 모두가 정의롭고 솔직해야 한다. 나라와 겨레의 안녕과 행복 이외의 모든 이해관계는 배제되어야 하며, 자의든 타의든 조그만큼의 거짓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시간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급하다 해서 목표, 과정, 결과 중 어느 하나에서 민주적 절차가 생략된다면 민주주의는 퇴색될 것이고 그 대가는 미래에 혹독하게 치르게 될 것이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지 오래되지 않아 성숙의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정치권이 솔선수범하여 우리의 민주주의를 갈고 닦으며 숙성시켜 나가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떨쳐 일어났고 동족상잔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냈으며, 장롱 속 반지를 팔아 전대미문의 외환위기를 이겨냈고 코로나의 질곡마저 헤쳐온 대한국민이다. 이제 선진정치를 맛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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