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우리는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세상에 태어나서 일 년 마다 한 살씩 먹는 이 법칙은 공평해서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다. 생명의료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평균수명이 계속 늘고 있지만, 여전히 100살을 넘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균수명이 80을 오르내린다고 하지만, 60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에게는 60이 한계수명인 셈이고, 불교에서 생명의 주요 조건으로 수명(壽命)을 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불교에서 생명의 주요 요건으로 꼽는 세 가지는 수명과 남녀의 결합, 중음신의 달라붙음이다. 마지막 요건인 중음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수정란 이후 어느 순간 형성되는 정신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형성된 수정란은 14일 정도가 지나면 원시선이 나타나고, 그 원시선은 각 생명 개체의 특성을 가능성으로 간직한 구체적인 출발점을 이룬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불교에서 중음신이라고 이름붙인 어떤 정신적인 영역의 가능성도 형성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태아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 뱃속에서 외부의 접촉에 반응을 보이는지, 또 그 반응의 정도가 언제부터 활성화되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뱃속의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움직임을 부모가 느끼기 이전부터 하나의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할 뿐만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가능성 또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때부터 임신중절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이 본격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나이’로 통칭되는 셈법은 그 태아에게 인격성을 부여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전통의 산물이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부여함으로써 엄마 뱃속의 시간을 인간의 나이로 인정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서구를 추종해서 서양의 모든 것을 표준으로 삼고자 했던 일본에 의해 수입된 ‘만 나이’가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고, 드디어 지난 달 공식적으로 ‘우리 나이’를 폐기하고 ‘만 나이’를 표준으로 삼는다는 선포가 있었다.

우리 나이의 셈법이 혼란을 초래한다는 것이 거의 유일한 이유이지만, 그 배후에는 서양 것이 표준이 되어야만 한다는 어떤 강박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것이든 서양 것이 좋고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른바 ‘선진국병’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20세기 우리 역사는 초기의 일본과 유럽, 중기의 미국 등으로 그 대상을 바꿔가며 무조건 따라가야만 한다는 ‘선진국 추종’의 역사였다. 그 결과 세계사에서 유래가 드문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목표의 동시 달성이 가능해졌다. 자부심은 느낄 만한 성과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하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사랑하는 지식인과 여전히 우리는 절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하는 노인, 중국이라는 ‘큰 나라’와 경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중국통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고통이 만만치 않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그 나라들의 실상이 무엇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그들은 모든 면에서 위대하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대주의자들의 눈빛이 곤혼스러움을 넘어 측은하게 다가설 때도 있다.

문제는 그들보다 우리 자신의 마음인지 모른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 좋은 삶의 핵심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 말이다. 어느 수준까지는 물질이 행복과 비례하고, 과학기술에 기반한 편리함이 우리에게 많은 시간적 여유를 보장해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풍요와 편리함이 필요 이상으로 확보되어 있고 남은 문제는 분배정의와 질적인 시간의 영위라는 사실에도 분명하게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늘리고자 목숨을 걸고 차를 모는 우리 일상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

나이가 지닌 권위와 의미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일상의 혼란을 이유로 발표된 ‘우리 나이 폐기’는 더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선다. 뱃속에 자리 잡은 인간생명체에 대해 온전한 존중의 눈길을 보내온 ‘우리 나이’는, 존엄성과 함께 다른 존재자들과의 의존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인간의 관계성을 상징하는 소중한 전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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