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밥을 먹듯 매일 그리기에 열중하는 삶, 노후 들어 더 자기세계 확실한 작품제작에 행복감 넘쳐

[동양일보]…박영대(朴永大·81·청주시 서원구 산남동)화백은 충북 청원군 강내면, 현재의 청주시에서 태어나 강내초-대성중-청주상고를 졸업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청주에서 성장한 그에게 화가로서의 출발은 고등학교 재학시절 때 만난 스승인 김종현(1920-1971)과의 인연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마음은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칭찬해 주신 게 평생 화가의 길이 됐다고 작가는 고백했다. 또 김종현 선생님의 깊은 영향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 교육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대성여고와 청주상고에서 미술교사로 10년 동안 재직, 교육계에 몸을 담아 선생님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화가가 되겠다는 뚜렷한 의지와 신념으로 39세 때 퇴직하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완벽하게 변신했다.…

-김종근<미술평론가> ‘송계 박영대를 말한다’ 머릿글에서.



그렇다. 송계松溪는 전업 작가가 되려는 꿈을 굳히자, 늦었지만 1975년 홍익대 대학원 연구과정을 거치는 동안 천경자(1924-2015), 박생광(1904-1985), 조복순(1921-1981)등 한국 채색화의 1세대들을 만나면서 작품세계에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그가 ‘보리’ 그림으로 처음 상을 타게 된 것은 1973년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였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그에게 보리는 더 없이 친숙한 곡식이었다. 해마다 길가에서 보아오던 보리였지만, 작가로 성장하면서는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고, 알곡 하나하나가 저마다 생명과 희망을 잉태한 ‘씨앗’으로 서슴없이 다가왔다. 그의 내면엔 이미 보리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과 삶의 일깨움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는 이를 화폭에 담았다. 바람결에 쓸리는 보리에 색을 입히고 혼을 불어 넣었다. ‘맥파麥波’- 1978년 백양회 공모전 최고상을 거머쥔 작품이었다. 이 큰 상이 그를 일약 ‘보리작가’로, 평생 보리만 그리게 만들었다. 충북 괴산 출신의 미술평론가 김종근(65)은 말한다. “당시 그 작품-‘맥파’의 풍경은 들판의 보리가 마치 실제 거대한 바다의 물결을 이루는 것 같은 장관으로 보리의 모습을 가장 리얼리티하게 표현, 많은 일반인은 물론 작가들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그로부터 그의 보리는 한국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허물고 기하학적 형태까지를 넘나들며 역동적이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혁신적인 기법까지를 동원하며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하며 뭇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보리작가로, 어찌 보면 한국 화단 보다 일본 화단에서 더 주목하는 그에게 큰 선물이 주어진다. 지난 2017년, 천안 백석대학은 큰돈을 들여 ‘보리생명 미술관’이라 이름 한 박 화백의 미술관을 상설개관 했다. 150평 규모의 전시관과 수장고에는 그의 1000호가 넘는 대작 등 무려 250여점이 보관돼 있다. 대학은 그를 석좌교수로 예우하고 매달 작품재료비로 45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지난 6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일본 동경에서 일본과 프랑스현대국제미술전 전시에 그의 작품이 초대됐다. 돌이켜 보면 한국과 일본의 교류전을 해 온 지도 어언 50년이 된다. 최근엔 청주시립미술관(관장 이상봉·조각가)이 지난 5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그의 작품만으로 기획전을 했는데, 1973년 초기 작품부터 2023년 최근작까지 시대 순으로 작품 60점과 스케치, 자필 원고며 사진까지를 곁들여 총체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전시 3개월간 시립미술관을 찾은 관람객이 총 7000명에 이르러 개관 7년 만에 가장 많았다. 충북대 미술과생들이나 청주교육대 영재교육생들, 청주여중 전교생들은 단체관람을 하고 ‘문화가 있는 날’ 콘서트를 열어 음악과 미술의 어울림을 체험케 했다. 그의 전시를 보려고 청주시립미술관을 처음 찾았다는 이들도 많았다. 그 중엔 서울, 대전, 천안 등 타 지역에서 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화단畫壇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사랑 받는 화가가 되어 있다. 2년 전 동양일보 창사 30주년 기념사업으로 펼친 ‘박영대 화백 청주‧충주‧제천 순회전’에서 그의 작품이 예상 보다 많이 팔린 것을 보아도 그러했다. 그는 “매일 밥을 먹으므로, 매일 그림을 그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사실이 그렇다. ‘그림을 그리기위해 그는 건강을 챙긴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진정한 프로로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물폭탄 장마’ 피해로, 오송 지하도 참사로 시민들이 참담해 하는 7월 중순이 지나고, 재난지역 선포로 복구의 삽질이 시작되는 하순에 접어들면서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비 피해는 없으신지요.

“나야 피해가 없지만 지역 곳곳이 물폭탄 세례에 정신이 없네요. 지구 온난화 현상이 빚는 재앙이라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 됩니다.”



●작업은 여전하시지요?

“그림그리기는 혼자서 하는 고독한 작업이므로 참을성과 끈기가 없으면 붓을 던져야합니다.

배울 때는 스승이나 선배의 도움이 절대적이지만, 혼자 섰을 때는 오로지 혼자의 작업이지요. 여전히 많이 그리고, 많이 읽고, 많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습관은 전업 작가를 결심하고부터 생겨난 습관입니다. 옛날얘기지만 서울로 올라가서 혼자 인사동 중국서점에 가서 중국화집이며 일본 화집, 교보문고에 가서 미국 등 서양화가들의 작품집을 틈나는 대로 섭렵했었지요. 물론 미술관이나 갤러리도 빼놓지 않고 다녔고요. 그런 것들이 많은 공부가 됐어요.”



●교단에 섰을 땐 어땠는지요?

“서양 미술사를 외우다시피 해서 가르쳤어요. 이론적인 무장을 위해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길 밖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서양미술사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요.”



●5~6년 전, 천안의 백석대학에서 박 화백의 미술관을 만든다 하여 의아해 했습니다. 청주 출신 화가의 상설전시실을 천안의 대학에서 마련한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그 많은 소장품 등이 다 그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니 섭섭하기도 했고요. 이 곳(충북)의 자치단체나 어느 대학에서도 러브콜이 없었나요?

“백석대학의 배려는 내게는 더 없는 축복이었지요. 그림그리기 밖에 모르는데 전시실과 수장고를 마련해주어 작품을 보관케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매월 그림 제작비로 적지 않은 금액을 지급키로 하는 등의 배려는 노후의 화가에겐 생각지도 못한 은혜지요. 이미 120호 전후의 대작들 200여 점이 수장고에 보호관리 되고 있습니다. 충북 쪽에선 아직 어떤 제안도 받지 못했고요.”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얼마나 되는 지요.

“100호가 넘는 작품들까지 모두 합치면 700점, 100호가 넘는 대작만도 500점 쯤 될 겁니다. 요즘도 계속 작업하고 있습니다. 근래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할 때도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런 창작 열기는 어디서 기인한다고 보시는지요?

“이 지역 출신으로 한국화단을 이끈 윤형근‧정창섭‧박노수‧이석우 화백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운기運氣를 받았다면 더 없이 큰 영광일 것이지요. 이 지역이나 내가 나온 학교의 선배들이 한국화단의 큰 산맥들이어서 늘 부럽고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나는 후대에 그 산맥의 작은 봉우리만 된다 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만….”



●청주의 유망한 후배 화가들이라면?

“청주나 충북도내에도 열심히 그림을 하는 젊은 화가들이 많이 있지요. 그 중에도 손부남‧이홍원‧신용일… 등 이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후배 화가들이 지역화단의 버팀목이 되어 있습니다. 눈여겨 보아주십시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내 좌우명이 ‘매일 밥 먹듯 그림을 그려라’입니다. 그리는 작업을 계속하려면 아무래도 건강을 챙기는 일이 우선입니다. 우선 하루 세끼 식사를 잘 합니다. 그리고 집안에서라도 힘차게 걷습니다. 500보를 걷는데 10분이 걸리지요. 시간이 좀 있다싶으면 1000보쯤도 걷고요. 요즘 들어 욕심이 생겼어요. 이제까지의 틀을 더 확실하게 벗어나 밀도 있는 작품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그 것입니다. 예술인에게 안주安住란 곧 무장해제武裝解除지요. 그러면 어제는 있는데 오늘과 내일이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과거만을 반추反芻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아직 건강하고 의욕이 넘치므로 더 실험적인 작품, 더 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잊혀 지지 않는 분이라면?

“많지요. 이 나이되도록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남들의 도움은 많이도 받았습니다. 정신적인, 물질적인 도움들이 과분했지요. 그 중 불현 듯 떠오르는 분은 청주상고 때 그림을 가르치신 김종현 선생님이십니다. 동경제대 미술과를 다니신 분인데 지금 생각해도 그만큼 열정적인 분이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미술부원이 10여 명이었는데, 방학이면 속리산이며 화양동에 텐트를 치고 합숙을 시키셨어요. 운동선수들이나 합숙을 하지 미술부원들을 합숙시킨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까? 그런데 일주일쯤의 합숙생활을 하며 그리기에 열중하다 보면 그림이 달라져요. 스케치부터 색칠까지 등 뒤에서 선생님이 지켜보시니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을 하며 그렸겠어요. 그리고 틈나는 대로 유명화가들의 일화를 들려주시는 겁니다. 자연 속에서 우리가 밥을 해먹으며 그림을 그리며 지도를 받았던 그 때 이미 우리는 화가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것이 지금도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또 한 분은 일본 동경의 교포 화가인 송영옥 화백입니다. 나 보다 15년 연상인데, 오랫동안 만날 적마다 화가나 예술인의 정신자세에 대해 모범을 보이시던 분입니다. 그 분에게서 받은 자양自養이 내 그림에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품격에 비례한다는 생각을 갖게한 분이지요.”



●끝으로 하실 말씀은?

“시인인 김영환 지사께 간곡하게 말씀드렸는데, 충북도 도립 미술관 건립의 꿈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시대에 걸맞는 좋은 미술관이 세워져서 이 지역 미술인들은 물론 국내,외의 좋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시민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

■ 동양일보 회장·시인



■ 박영대 화백은…



1942년 청주 출생. 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현) 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들로 25번길1 송계미술연구소. <개인전>1981 한국화랑 초대전 (뉴욕, 미국) 외 50여회.

<주요 국제전> 2009 그랑팔레전 (파리, 프랑스), Tokyo-TEN 그랑프리 수상작가 특별전 (동경도미술관, 동경, 일본) 등 4회. <수상>1978 백양회 공모전 ‘맥파麥波’로 최고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91 Tokyo-TEN 그랑프리 수상 (동경도미술관, 동경, 일본) 2011 사롱드브랑 대상 수상 (오모리빌 아트리움, 동경, 일본) <작품 소장처> 대영박물관(런던,영국), 로고스갤러리 (런던, 영국), 캐롤갤러리(뉴욕, 미국), 경기도미술관, 한국은행, 신미술관, 남포미술관, 공군사관학교, 메타바이오매드, 백석대학교, 청주대학교, 대청호미술관, 성남아트센터, 충북도청, 충북대병원 등. <현재> ICA 국제 현대미술 협회장, 씨올미술협회, 오늘회, 국전작가회, 세계미술협회, 현대미술한일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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