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화가

정명희 화가
정명희 화가

[동양일보] 1945년 8월 15일은 온 국민이 절치부심할 광복절이다.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서 해방을 맞은 까닭이다. 어려서부터 해방둥이란 말을 귀에 달고 살아온 세월이 벌써 78년이나 되었다.

절치부심이란 무엇인가?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 썩임을 뜻한다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잊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에 대해 이를 회복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치욕적인 과거를 연상케 하는 따위의 애들 장난 같은 얘기로 서로 상처받지 않게 조심해야 마땅하다.

속은 부글거려 부아가 치밀어 오를지라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도 역사를 잊은 듯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절치부심이란 고사는 많지만 춘추전국시대의 부차(夫差) 얘기가 우선한다. 그러나 단순한 복수는 진정한 의미를 퇴색 시킬 수도 있기에 시대성에 부합하는 절묘한 방법을 궁리해야만 한다. 이를 악물고 80여년을 버텨 이제 그들과 엇비슷해지고 있는 판이다. 문화예술 면에서는 이미 그들을 앞서고 있지 않은가. 넉넉잡고 100년쯤 버티고 난 후에 꺼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고 결국 그들이 제 발로 무릎 꿇고 기어와 사죄할 때까지 기다릴 인내와 용서할 배포를 준비해야 한다.

걸핏하면 쓰는 친일이란 용어를 아무렇게나 희화시켜 좋을 게 뭐냔 소리다. 우린 온 국민이 성씨를 개명하는 치욕도 격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국민 모두가 친일인 셈이다. 2차 대전의 전범국들은 모두 다시 일어나 국제정세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다. 때문에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모든 사건에 대해 사과는커녕 대놓고 비아냥거리기 일 수다. 아니 독도에 대해서는 생떼를 쓰며 자국 영토라 우겨대는 망언을 일삼는 그들이다. 솔직히 말해 그들 앞에서는 누구도 정면으로 들이댈 용기 없는 우리의 정치판이 아닌가. 국민은 절치부심하고 사는데 그들은 내로남불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혈안이다. 늦어도 한참 늦은 얘기일지는 모르나 일제 능욕을 잊기 위해서라도 국민투표를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어느 선까지 도려내야 정치인들의 경각심을 바로 세울 수가 있을 것인가를 알고 싶은 까닭이다. 을사5적에 알파를 얼마나 더 보태야 자멸의 길을 면할 것인지 묻고 싶다. 국민은 다 아는 사실을 알량한 세력에 눈이 어두워 그들만 잊고 지내는 까닭이다.

일본노래 ‘천개의 바람’은 2003년 일본 작곡가 아라이 만(新井 滿1946~ )이 만든 곡에 미국의 작가미상 추모시로 가사를 붙여 만든 것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바 있다. 그는 평화와 환경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음악가다. 마침 김수환(1922~2009) 추기경과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의 서거와 맞물리면서 추모곡으로 헌정되었다가 최근 이태원 핼러원 참사의 추모곡으로도 쓰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가 되었다. 다만 이 ‘센노 가제니 나테’란 노래가 국민적인 호응을 받고 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예술작품엔 국경도 없고 이데올로기마저 너그럽다. 인도주의적 인류애가 스며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독일의 지휘자 카라얀(1908~1989)을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젊어 한때 나치의 친위대에 몸을 담았었다. 그러나 독일은 눈을 감고도 지휘할 수 있다는 영상물 78종, 음반 509종을 남긴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를 용서하고 자국으로 불러들였다. 세계적인 예술가를 잃지 않기 위한 국민적 결단의 호응이다. 우리도 일류 국가의 국민답게 행동하고 모범을 보일 때가 되었다. 국가의 격을 높이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이며 나아가 인간적 본태를 되찾는 첩경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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