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 박팔괘의 생애와 예술(1)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장양리 산108 박팔괘 묘소.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장양리 산108 박팔괘 묘소.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청주는 높은 예술혼과 정신을 지닌 문학예술계의 최고봉들이 탄생한 지역이다. 동양일보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의 일환으로 한국 문학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청주출신 작고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작고예술인은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선정했다.

1. 청주에서 출생했거나, 30년 이상 청주에서 활동한 예술인.

1. 1930년 이전 출생자 가운데 객관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예술인.

이에따라 △박팔괘(음악.1880~1946) △김복진(미술.1901~1940) △김기진(문학.1903~1985) △안승각(미술.1908~1995) △신동문(문학.1927~1993) △윤형근(미술.1928~2007) △송범(무용.1929~2007) △이상덕(음악.1925~2004) △이상복(서예.1929~1994) 등 9명의 예술인을 선정, 생애와 작품세계를 기록으로 남긴다.

동양일보 1998년 3월 16일자 기사.
동양일보 1998년 3월 16일자 기사.

 

●고종임금 앞에서 가야금 연주

‘오래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말이나 이야기를 전설(傳說)이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설을, “① 말하는 화자와 듣는 청자가 그 이야기의 사실을 믿으며, ②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기념물이나 증거물이 있으며, ③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어 역사에서 전설화했다든가, 혹은 역사화의 가능성이 있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주출신 작고 예술인 가운데 전설로 회자되는 사람은 박팔괘(朴八卦)(1880~1946)다.

“그가 나오기 전에는 서울에 가야금이 없었고, 그로 말미암아 서울에 가야금이 알려졌으며, 그는 가야금을 잘 탔는데 어전(御前)에서 여덟 괘만으로 가야금을 능히 타서 팔괘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국악연구자 이보형은 “박팔괘의 생애와 예술”에서 1960년대 지영희(池映熙) 이충선(李忠善)등 옛 음악인들이 여러 차례 일러주었다고 기술했다.)

그에겐 확인되지 않는 여러 이야기가 전설처럼 따라다닌다.

국악인 박동진은 박팔괘가 고종임금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가야금 12줄 중에서 4줄이 차례로 끊어지는데도 흔적없이 8줄로 잘 탔기 때문에 고종이 감탄하여 “네 이름을 팔괘라고 하라”고 하여 박학래(朴學來)라는 본명 대신에 팔괘(八卦)라는 이름을 썼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고종임금의 총애를 받아 명성황후와 사진을 찍었고, 임금이 감탄하여 손목을 잡자 손목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손수건을 감고 다녔으며(5남 박대기 인터뷰), 고관대작의 소실들이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납치를 할 정도로 요즘 말로 ‘스타’였다는 박팔괘.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자료가 없이 이야기로 전해져 오는 것이고, 그를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1908년 미국 빅타(Victor)·콜롬비아(Columbia) 음반회사의 유성기음반에 가야금병창을 취입한 것이다. 김창환 이동백 한인호 송만갑 등 당시 최고의 명인명창들과 더불어 취입한 음반은 우리나라 음악을 녹음한 최초의 음반으로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음반은 찾을 수 없으나, 한국문예진흥원 문화예술자료관에 Victor 42983-AB “가야금 남자 단가 가객 박팔괘-상편하면 충청도 죠션어”라 적힌 가야금병창 단가 취입의 유성기음반자료가 남아 있다.

또하나 박팔괘의 존재를 알리는 큰 업적은 그가 충청제(忠淸制)를 만든 전설적인 명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독창적인 가야금산조를 짜서 연주하였고, 제자인 박상근에게 전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정통파의 산조들과 다른 특색을 지닌 충청제의 독자적인 가락이었다. 그리고 그 가락은 박상근을 통해 성금연에게 전수되어 성금연 산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았다.

●북이면 장양리 산소찾아 묵념

2023년 8월2일. 35도를 웃도는 폭염속에서 박팔괘 산소를 찾았다. 25년 전인 1998년 3월9일 박팔괘의 5남 박대기(朴大基)(1927~작고)와 그의 부인 이덕순(작고)의 안내로 찾아갔던 기억을 더듬어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장양리 산108번지(당시는 청원군이었음)를 찾았다. 내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번지였다. 장마로 패인 흙길을 헤맨 끝에 밭 가운데 자리한 야산에서 풀에 덮인 상석 하나를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密陽朴公英春之墓’라 쓰였다. ‘가선대부동지사중추부사(조선시대 중추부에 소속된 종2품의 관직)를 제수 받은 박팔괘 아버지 박영춘의 묘였다. 박팔괘의 묘는 박영춘 아래쪽에 있을 것이어서 허리에 차는 잡목과 풀숲을 헤치며 내려가니 역시 풀에 가려진 상석이 보인다. 흥분이 되고 가슴이 뛰어서 풀을 젖히고 읽어보니 짐작이 맞았다. ’伽倻琴散調乃竝唱之名人通政大夫密陽朴公八卦之墓‘(가야금산조와 병창의 명인 통정대부 밀양박공팔괘의 묘). 박팔괘 산소였다.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를 이른다. 박팔괘의 묘지는 원래 외평리 뒷산에 있었는데 1981년 부친 박영춘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998년 3월 찾았을 때는 상석이 없이 봉분만 있었으나 우리가 다녀간 후 그해 9월 며느리 이덕순이 세운 것으로 기록이 돼 있었다.

산소를 찾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25년 전 이 산소를 찾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보형 문화재전문위원과 김영진 청주대교수, 노환홍 서원대교수와 박균 씨 부부 등 우리는 박팔괘가 청주사람이라는 실체를 찾아 감격에 겨워 손을 마주 잡았었다.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로 한국 문학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청주출신 작고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첫 시작을 국악인 박팔괘로 계획했다. 그리고 첫 이야기는 그의 무덤에서 묵념을 올리는 것으로 출발한다.

동양일보 1998년 3월 20일자 기사.
동양일보 1998년 3월 20일자 기사.

 

●기록 달라 ‘생몰연대’ 부정확

박팔괘는 생몰년이 정확치 않다. 박팔괘를 기록한 두 사전에도 각각 다르게 표기돼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황병기, “박팔괘”)은 그의 생몰년을 1882년에서 1940년으로 기록했지만, <한국음악사전>(백대웅, “박팔괘”)은 1876년에서 1946년으로 기록했다. 앞 사전은 호적기록에 따른 것이고, 뒤의 사전은 박팔괘의 제자인 박상근(1905~1949. 일제강점기 독자적인 충청제의 산조가락을 만든 가야금산조의 명창)의 말에 따른 것이다. 박상근은 박팔괘가 해방직 후 71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고 증언하였는데, 이것으로 계산하면 생신년이 1876년이 된다.

생년에 대해서 박팔괘의 5남 박대기는 “아버지는 용띠이고, 어머니는 뱀띠여서 주위에서 용띠와 뱀띠가 어떻게 같이 사느냐”고 했다고 하였다. 박대기의 말이 맞는다면 박팔괘는 1880년(庚辰년)생이거나 1868년(戊辰年)생이 되는데, 이중 호적(1882.6.3.)에 가까운 나이를 본다면 박팔괘의 실제 생신년은 1880년일 가능성이 높다.

사망년도에 대해서도 황병기는 1940년으로 적었지만, 박팔괘의 호적에는 소화 20년(1945년) 7월21일로 적혔다. 그러나 박대기와 손자 박인규는 1946년 7월21일이라고 했다. 박팔괘가 해방 후 작고했다면 1946년이 맞을 듯 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생몰연대와 증언에 의한 생몰연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882~1940(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82~1945(박팔괘 호적)

⚫1876~1946(한국음악사전)

⚫1880~1946(아들 증언)

이 가운데 실제 생몰연대로 여겨지는 아들 박대기의 증언을 따라 박팔괘의 생몰연대를 1880~1946으로 적는다.

●‘팔괘’ 이름에 대한 여러 설

그의 이름이 ‘팔괘(八卦)’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는 그의 본명이 박학래였는데, 고종 임금 앞에서 연주 중 12줄 가운데 4줄이 끊어졌는데도 연주를 잘해서 임금이 “팔괘라고 하라”고 해서 팔괘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황병기 교수는 호적에 팔괘로 올린 것으로 봐서 이는 후인들이 꾸며낸 전설이라고 한다. 장남 박동기(朴同奇)의 아들인 손자 인규(仁圭. 1993년 당시 73세. 작고)는 박팔괘의 교지를 본 일이 있는데 교지 위에 정육품과 광무(光武)8년(1904년)3월, 그 밑에 박학래(朴學來)라 적혀있었다 하며 박학래가 박팔괘의 원명이라고 하였다. 교지는 증평사람이 사갔다고 하니 실물이 없어서 확인할 바가 없다.

인규는 또 “박팔괘가 최고의 경지인 8괘를 터득하였다는 뜻으로 팔괘”라 하는 설도 있고, “전국 팔도 중에 제일이라는 뜻으로 8괘라 했다”는 설도 들었다고 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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