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886(헌강왕 12)년 조구 화상이 창건
보석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보석사 전경
보석사 전경

[동양일보 김현신 기자]보석사(寶石寺)는 금산군 남이면의 진악산(進樂山)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보석사는 통일신라 886(헌강왕 12)년 조구 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봉(물굴봉) 아래로 흘러내리는 보석천에 동편 산기슭에 기대어 보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보석사라는 이름의 기원은 창건 당시에 사찰 앞 산허리의 큰 돌에서 금을 채광해 불상을 주조한 것에서 비롯됐다. 지금은 그때 주조한 불상은 없지만 그 뜻은 불사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았다.

조선전기 까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오던 보석사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됐다.

보석사 대웅전 시도유형문화재
보석사 대웅전 시도유형문화재

폐사됐던 보석사를 1627(인조5)년에 해원(海元 )스님이 부분 중건했다. 이어 1766(영조 42)년에 시임화상수영(時任和尙守英)이 중건한 것이다

1882(고종 19)년에 명성황후가 보석사의 은혜를 입어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그리고 순종의 장인인 민태호와 훈련원 주부 유천혁을 금산으로 보내 보석사를 중건하게 하였다.

1912년에는 금산군이 전라도에 속해 있어서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전북도 불교의 이사중추기관(理事中樞機關)이었다. 금산이 1963년 충남도로 속하게 되면서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로 편입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56년 발간된 금산 향토지 금원(錦苑)에 의하면 과거 보석사는 금산군, 무주군, 진안군의 중심지로 500여명의 학인(學人)이 수학하고 3000여명의 신도가 수시로 참선했다고 한다.

6.25 전후에는 학인실(學人室)과 조사실(祖師室)을 대자애육원(大慈愛育院)이라는 아동보호 시설로 전환해 전쟁고아 200여명을 수용해 돌보았다고 전한다.

보석사  은행나무 1000년 이상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받아 보호·관리
보석사 은행나무 1000년 이상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지정받아 보호·관리

보석사는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이 많다.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 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목조석가여래 삼존상(충남유형문화재), 선각(요사채·문화재자료), 병승장비(문화재자료) 등이다.

절입구에 둘레 11m의 은행나무는 창건주 조구가 제자 5인과 더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하며,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마다 울음소리를 내는 영험을 지닌 나무로 전해진다.

그러나, 보석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정사각형의 가람 배치를 바꾸고 개조하게 돼 문화재자료에서 지정해제 됐다.

장곡 주지스님
장곡 주지스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가 돼 전북도 일원에 있는 33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산신각·의선각·기허당·요사채 등의 당우(堂宇)가 남아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의선각(毅禪閣, 충남도 문화재자료 제29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을 도와 승병대장으로 활동하던 영규대사(靈圭大師)가 머물러 수도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금산 김현신 기자 nammikl@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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