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동양일보]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이 질문을 두고 서구 물리학계는 3백년 간 싸웠다. 아이작 뉴튼이 프리즘으로 빛을 분해하는 실험으로 입자라는 걸 검증했다고 선언하자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미 그 당시에 빛이 파동의 특성인 간섭 현상이 있었음에도 뉴튼은 이 증거도 무시했다. 20세기에 아이슈타인마저 금속에 빛을 쏘여 전자가 나오는 실험으로 입증하자 빛은 파동이라는 주장은 괴담이 되고 말았다. 영자역학에 이르러서야 빛은 두 성질을 모두 갖는다는 해괴한 주장이 인정받기에 이른다. 아이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몹시 혐오했다. 젊은 과학자들이 물리학으로 장난을 한다며 꾸짖는 꼰대가 되고 만 거다.



이 당시 미국에서 양자역학은 “소년들의 물리학”이었다. 과학자들의 모임에서 원로 과학자가 젊은 제자에게 “자네는 요즘 양자역학을 한다며?”라고 물으면 부끄러워 대답을 못할 정도였다. 그 소년 중 한 명이 원자탄의 아버지라고 날려진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하버드 대학에 다니던 그는 미국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런던 케임브리지로 전학한다. 거기서 닐스 보어를 만났지만 불화를 겪고 독일로 건너가 하이젠베르크를 만난다. 독일은 양자역학의 천국이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독일의 천재적 물리학자들은 10여년이 지난 후에 나치에 협력하여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다. 1940년대에 미국에 돌아 온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가 이 무기를 손에 쥐는 악몽에 시달렸다.



원자탄은 현대 물리학의 가장 빛나는 성과이면서, 인류 절멸의 비극을 탄생시킨 비극이기도 하다. 최근 개봉된 영화 오펜하이머가 보여주는 이중적 진실이다. 인류의 지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이 과학혁명은 빛은 입자이며 파동이기도 하다는 불편하고 모순된 명제를 수용하는 데 있다. 더 나아가 확실하고 검증된 단일한 사고를 맹종하는 근대의 지식과 결별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순되고 상반된 진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왜 중요한지 가르쳐 준다. 복잡하며 모순된 세상을 단순성의 근대 이데올로기로 해석하지 말고 풍부하고 유연한 사고로 맞이하라는 가르침이다.



최근 우리 정치권력은 공산 전체주의의 반국가세력을 척결을 외치며 공산주의 전력이 있는 독립 영웅들에 대해 재평가하자고 말한다.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활동 경력을 소환하며 그 흉상을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끌어내리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을 끌어내려다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도 수모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원자탄 개발로 미국의 국민 영웅된 오펜하이머도 젊은 시절의 사회주의 운동과 연루된 혐의로 다시 여론 심판에 소환되어 비극적으로 일생을 마쳤다. 메카시즘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소환되며,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하라는 지적 폭력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이런 근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시 부활하는 지금의 한국 상황은 1950년대의 미국 정치 상황과 유사하다. 홍범도 장군이 활동한 1920년대의 식민 조선에서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백년 전의 상황을 두고 벌어지는 지금의 사상 논쟁은 빛은 입자인지, 파동인지 하나만 선택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만일 공정하게 이 문제를 다루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조직책 활동 전력도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누구 공산주의자이고, 누가 자유주의자조차 헷갈린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이념논쟁이란 황당하고 엉뚱한 일이었다. 역사는 집단의 기억이자 자존심을 통해 새로운 통합을 달성하는 영역이다. 우리가 역사를 함부로 다루게 되면 식민지 시절에 완전한 정의나 완전한 불의는 없었다는 자기모순과 냉소주의에 빠져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는 심리적 내전으로 연결되어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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