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문학평론가

이석우 문학평론가

[동양일보]덕혜옹주는 경성의 “히노데” 소학교 시절, 한국에 있을 때 동요「벌」,「쥐」,「비」,「전단」을 썼다. 그밖에 동요「푸른 잎의 오월」,「봄이 왔다」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들은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인 1922~23년에 지은 것으로, 그녀의 나이는 11~12세였으니 그녀의 감수성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 강점기 덕혜옹주의 동요는 거의 노래로 만들어졌다. 이중「벌」,「비」,「전단」의 악보는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노란 옷 입은/ 작은 벌은/ 엉덩이에 칼/ 군인 흉내를 내며 / 뽐내고 있네.” -「벌」 전 문.



“따라락 또로륵/ 쥐들의 난리법석/ 쥐야쥐야/ 무얼 하니/ 오늘은 집안일의/ 대청소/ 그래 서 난리 부리며/ 있는 게로구나” -「쥐」 전문.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 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느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 -「비」 전문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커다란 날개 단 비행기가/ 전단을 잔뜩 뿌리고 있다./ 금색 전단 은색 전단/ 나는 그것을 갖고 싶은데/ 바람의 신이 데리고 간다./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자니/ 솔개가 있는 데에서 놀고 있다.”- 「전단」 전문.



「전단」은 덕혜옹주의 유학 송별연에서 자신이 직접 부른 동요이다. 일본 학습원 유학시절(1925~)에는 “왕손 전하 탄생의 노래”, “양 폐하(다이쇼 천황& 황후) 은혼식”이라는 동요도 쓴다. 일제의 강제 유학 추진으로 그녀의 삶이 왜곡되기 시작하더니 그의 순수한 문학 정서에 피멍이 번지고 있었다. 이 동요가 도쿄 라디오 방송의 전파를 타고 세상으로 흘러나왔을 때, 조선 백성들은 덕혜옹주의 조선 혼이 조금씩 엷어지는 것에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올 일이다.

1929년에는 별도의 제목이 없는 “해 뜨는 나라의 천세의 광영을 진하게 잎마다 다짐하는 배움터의 소나무”, “친구들과 히노데의 뜰에서 함께 노닐던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스승님께 이끌려 헤쳐 들어간 글 숲이 너무나 흥미로웠구나” 등의 3편의 시도 남긴다.

그 외에 일본에서 쓴. 와카(和歌·일본의 정형시) 9편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에 대한 정체성은 점점 흐릿해지고 그 추억만이 저녁놀처럼 들녘을 물들이고 있으니 조선 백성들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며오는 것이었다.

덕혜옹주의 동요들은 소녀 감수성이 곱개 묻어나는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는 뛰어난 작품들이다. 1923년 이전의 동시 작품이라고 정의할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동시라고 명명하던 장르가 없던 시절이니 가히 우리나라 동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이토 총독으로 인하여 시적 감수성의 순결이 더럽혀지고 말았다. 의도 불순하게 곡을 만들어 틀면서 조일 융합의 정책에 순응하는 증좌로 옹주의 동시를 이용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우리는 흘러간 과거를 소환하면서 동요한 편을 읽으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덕혜옹주의 동요들은 1929년에 일본 빅타(Victor) 레코드에서 음반으로 제작 발매하였다. 음반 기록지에는 “덕혜희어작가 德惠姬御作歌”라고 표기되어 있다. 덕혜옹주 다음에 왕족 존칭의 뜻으로 ‘御’ 자를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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