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김복진의 생애와 예술(3)

김복진 프로젝트.
김복진 프로젝트.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조각가, 미술비평가, 연극운동가, 독립운동가

팬티차림의 소년이 늠름한 자세로 서 있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눈매와 꽉 다문 입, 벌어진 두 어깨, 그리고 주먹을 쥐고 있는 두 손, 막 발짝을 떼어놓으려는 듯 앞으로 내민 왼발.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의 마지막 작품인 ‘소년’(1940) 입상이다. 1940년 5월 19회 ‘조선미전’에서 추천작가로 그를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한 ‘소년’ 입상은 암울한 식민지 일제말기의 참담함 속에서, 미래를 향해 나가는 듯한 전향적인 자세로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줬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한 지 3개월이 채 되기 전에 눈을 감았다. 39세,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그는 그해 3월부터 잡지 <조광>에 장문의 회고담 ‘조각생활 20년기’를 연재중이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우리나라의 첫 본격 조각론이라 할 수 있는 글 ‘조선 조각도의 항방’을 발표하고, 6월에는 마지막 비평인 ‘제19회 조선미전 인상기-조각부’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마치 얼마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예감한 듯 한국조각의 미래를 위한 비평문을 한꺼번엔 쏟아놓았다.

8월 18일은 그가 떠난 지 83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미술인 몇 명과 청주시 서원구 팔봉리 산자락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았다. 김복진 무덤을 찾아내 처음 세상에 알린 정창훈 조각가(전 주성대 교수)와 청주미술협회의 손희숙 회장, 지경수 부회장, 원미양 사무차장과 이상봉 청주시립미술관장, 정상수 학예팀장, 서정두 학예사, 그리고 유족대표로 노현숙(한밭대교수. 김기진 손부)씨가 참석했다. 산소를 찾은 이유는 김복진이 받은 훈장을 청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해 참배를 하고 그 사실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2023년 8월 18일 청주미술인들이 김복진 기일에 산소를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
2023년 8월 18일 청주미술인들이 김복진 기일에 산소를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

 

김복진은 독립활동을 인정받아 199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당시 이 훈장은 동생 김기진(문인. 1903~1985)의 딸인 김복희(성악가. 작고)가 받아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미국으로 떠나면서 정창훈 교수에게 맡겼고, 정 교수는 다시 ‘김복진미술제’를 주관하는 청주미협에 맡겼는데, 2023년 청주시가 ‘1회 김복진미술상’을 제정하는 등 본격적인 추모사업을 시작하면서 시립미술관이 영구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정리가 된 것이다. 훈장은 이날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전달했다.

김복진은 한국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각가이지만 ‘공주 신원사 소림원 석고미륵여래입상’과 ‘러들로 흉판’정도만 남았을 뿐 그의 작품은 모두 사라지고 도판으로만 전해진다.

2022년 12월 청주시립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기획으로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아 김복진 작품을 복원한 전시를 열었다. 도판으로만 보던 김복진의 대표작 ‘소년’과 ‘백화’가 과학의 도움을 받아서 석고상으로 복원돼 눈앞에 나타났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정창훈 조각가와 청주미협관계자, 유족대표가 김복진 훈장을 청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있다.
정창훈 조각가와 청주미협관계자, 유족대표가 김복진 훈장을 청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있다.

 

김복진. 그는 한 시대를 이끈 선각자였다. 조각가이자, 미술비평가로, 연극운동가로, 사회운동가로 거침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며 살았다. 동생 팔봉 김기진과 함께 카프(KAPF :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창설하고 파스큘라(PASKYULA)를 만들고 연극연구회 토월회를 만들어 전국순회공연을 열고, 말년엔 출판사 애지사를 설립하는 등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김복진 사진.
김복진 사진.

 

배재고보진학...반도구락부 결성

김복진(金復鎭)은 1901년 음력 9월23일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현 청주시 서원구) 팔봉산 기슭에서 함경도 군수였던 아버지 김홍규(金鴻圭)와 어머니 김현수(金現洙)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정관(井觀).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이 2살 터울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은 사람이었다. 팔봉리의 한학자 김사과를 가정교사로 들여 일찌감치 형제에게 글을 가르쳤다. 1907년 아버지가 강원도 춘천으로 전근을 떠나자 어머니는 두 아들과 가정교사를 데리고 경성으로 옮겨 가정교육을 계속했다.

1910년 9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황간군수로 발령이 나서 온 가족이 황간으로 이주해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때 두 형제는 아버지의 명으로 댕기머리를 풀고 삭발을 한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아버지가 관직을 내놓게 되자, 가족은 관사를 내놓고 황간읍 남정리로 이사한다. 학급내 구타사건이 벌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형제를 자퇴시킨 후 고향인 팔봉리의 숙모에게 보내 김사과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계속 공부하도록 시켰다.

1913년 아버지가 영동군수로 복직이 되자 김복진 형제는 영동보통학교로 학적을 옮긴다. 김복진은 어른들의 강요로 14세 나이에 조혼을 하나, 첫날밤 소박(疏薄)을 하고 10년 뒤 관계를 정리한다.

작품 소년.
작품 소년.

 

2016년 동생과 함께 경성고보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자, 신설된 배재고보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 작은 숙모가 경성으로 와 형제를 돌보았다. 김복진은 엄격한 규율을 앞세우는 학교가 답답했다. 기존질서를 벗어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치열한 과정을 겪는데, 그 바람에 학교에선 문제아로 찍혔다. 그는 다양한 것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1학년 때 <매일신보>에 수필을 투고하여 실린 것은 문학에 대한 꿈을 갖게 했다. 그는 틈이 나면 학과 공부 대신 단성사나 우미관, 광무대를 출입하면서 연극과 영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재능은 당시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여 김기진·박영희·이서구·김기진 등과 반도구락부를 만들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형제는 ‘독립신문’을 인쇄해 거리에 뿌리며 투쟁을 했다.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훈방으로 풀려났는데 마침 학교가 휴교를 해서 영동 부모 곁으로 가 근신 생활을 했다.



동경미술학교 진학해 근대조각 입문

그의 삶에서 전환기를 맞은 것은 일본유학이었다.

1920년 6월 아버지에게 법학 전공을 약속하고 김복진은 동생 김기진과 현해탄을 건너간다. 법학을 공부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는 법을 공부할 생각이 없었다. 어느날 동경 우에노공원에 나갔다가 색을 입힌 석고 조각 <노자>를 보고 조각에 관심이 생겼다. 동생과 토론 끝에 그는 조각을 공부하기로 결심,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선과생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조각과를 선택한 것에 대해 김복진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우에노(上野)공원을 지나가다가 지금의 일본미술원 전람회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작자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으나 <노자>라는 제명으로 석고착색을 한 조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 여기서 나는 이리저리 훑어보고 나대로 궁리를 하기 시작하였지요. 이날 동행으로서 팔봉과 같이 갔는지라 형제가 공원 의자에 앉아 가지고 토의를 거듭한 나머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을 하여 보자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자 새로운 고민이 앞섰다. 열정으로 외로움은 이겨낼 수 있었지만,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씩 경험하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고민을 했다.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일까?”

작품 여인입상.
작품 여인입상.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1852∼1934)은 그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그를 조각의 세계로 안내한 스승이었다. 다카무라 고운은 불사를 하던 장인에서 조각가로 변신한 일본 최고의 목조거장이었다. 김복진은 예술적 고뇌나 작가적 각성없이는 석공이나 목공이 직능별 기술에 그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김복진의 이러한 동경유학시절의 고뇌는 한국의 근대미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카무라 교수로부터 교육 받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은 그의 예술관과 작품세계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김복진의 주된 관심사는 조선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김복진 외에 조각을 공부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본격적인 근대조각은 김복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나보다 먼저 조각을 공부한 김진국이 있었으나 요절하고, 진남포의 곽윤모도 병사하고, 동경미술학교 재학중인 김두일도 신경쇠약으로 쾌유하지 못하니 조각계의 태생기는 다른 부문의 예술보다는 훨씬 쓰라린 바 많았다” 잡지 <조광>에 연재한 ‘조각생활 20년기’ 회고담에서 밝혔든 김복진은 스스로도 조각을 처음 들여온 사람이라고 믿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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