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 바닷가에 가로등이 많으면 좋겠다. 일몰이면 길게 늘어선 가로등마다 정다운 눈빛처럼 제 밑을 환히 비추고 있으면 좋겠다. 해변에는 남은 여름을 아끼며 탕진하는 이들이 그 아래 오고 가면 좋겠다. 텐트나 캠핑카에서 분주히 저녁을 해 먹고 한요해진 이들이 모래밭으로 나와 일몰에 젖고, 어쩌다 바다를 찾아나선 이들이 한 풍경에 있으면 좋겠다. 청춘들의 밀어와 아이들 웃음소리와 사람이 기르는 동물들이 며칠은 더 소담스럽게 어울렸으면 좋겠다. 불볕이 들락이고, 사선으로 드는 햇살이 비추면서 가는 계절과 오는 시절이 한동안 섞이면 좋겠다. 모랫벌이 서늘하게 식고, 물빛 청량해지는 어느 때 해변이 몸살 뒤 핼쓱해진 얼굴같이 조금 쓸쓸해지는 일은 아직은 나중이면 좋겠다.

바닷가 가로등은 밤이 깊어도 빛나면 좋겠다. 사위 어두워진 해변에 가로등이 착한 당신 눈빛같이 켜 있으면 그 언저리는 안온하리라. 티끌같은 세사는 바다 끝 불빛처럼 멀고, 시야가 아득해지는 시간이면 멀리 섬일지 배일지 해안선에 불빛이 빛나면 세상의 일이 티끌같기도 하겠다. 낮에도 창에 불을 켜두는 흔한 해물 음식점들은 손등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음식을 쟁반에 받쳐 나르고, 손잡고 걸어 다니는 젊은이들과 나이든 몇 무리의 흥겨움도 아직은 물결처럼 넘실거리면 좋겠다. 마치 조개껍질들 묶어 목에 걸어본 적 있는 것처럼 바다는, 해변은 또 낯익고 그리울까.

구월, 맑은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내다보면 백두산 가는 길 온통 푸른 녹음처럼 눈이 맑게 씻기기도 하겠다. 잠자리 깨끗한 신축호텔 육층쯤 숙소에서 한결 적막해진 물가를 응시하면서 캠핑카를 사고 길 위에서 잠드는 여행을 또 꿈꾸기도 한다면, 그런다면. 보물지도 펼치듯 할 수도 말 수도 있을 수많은 선택지 늘여놓고 낯선 항구 같은 행선지 짚어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고단함일까. 정작 떠나는 일이 손가락 꼽을 만하다고 해도 이런 낭비는 얼마나 즐거운 허세일지.

해질녁 함박 구름이 물들어 하늘도 온통 붉어지는 장관 앞에서 함께 있던 이의 소소한 실수 따위는 코딱지 같아질지 모른다. 하나님이 하늘에 그림 그리시는 그 시각에 맥락 없이 마냥 관대해지지 않고 못배기는 심정에 휩싸일 수도 있다. 노을은 지는 일의 비장함에 속수무책 휘둘리게 하고 오랜 인류의 운명 같은 게 떠올라 장엄하게 목숨 질 어느 때가 마음 안에 펼쳐지기도 할 것이다. 일렁이는 물결과 하늘을 그득 채운 구름이 붉게 물든 휘황함에 절로 머리가 끄덕여지기도 하고. 당연하듯 당신 남은 시간이 은혜롭기를 구하게도 될 것이다.

바닷가 침구 깨끗한 숙소에서는 사치하듯 보호받듯 평온에 싸여 흉흉한 세사 따위 모르는 애처럼 깊이 잠드는 거다. 감상에 가까운 안도를 치장처럼 두르면 어둠도 계절도 깊어가리라. 가로등은 빛나고, 그 아래 사람들은 놀다가 쉬고 누군가는 나그네로 지낼 일을 모험처럼 기획하는 동안도 한 시절은 갈 것이다.

또 한 시절이 간다. 당신이 보낸 눈웃음처럼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을 남기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도 당신 착한 눈웃음으로 두 계절쯤 너끈할까. 그 뒤에는 따순 날들 기다리는 조바심으로 또 한 시절을 살아내면 될 일이고. 마주칠 적마다 그저 착하고 정답게 웃는 건 당신의 무심한 일이겠다. 그걸 친절로 의미 짓는 건 마주한 이의 예의가 되리라.

물살이 오고가고 사람이 다녀가고 계절이 지나고 물새 나는 바닷가에 서면 시간이 정화된다면 좋겠다. 폭풍은 잠잠했으면 좋겠다. 어디서고 만나는 뉴스에서 요즘은 공산주의자를 말한다. 국가와 정권은 섞이고, 통치자와 절대자, 이념과 이상도 뒤섞이는 듯하다. 좋은 건 박수치고 맘에 안들면 비판하는 당연한 일들이 무서워진다. 정권이 바뀌어 나이 줄여준 건 좋고 다른 게 마음에 안 들면 공산 전체주의자가 될까. 이 시국에 바닷가 그것도 가로등 이야기는 너무 소시민적인가. 어쨌거나 한요한 허세에 휩싸여본다, 숨통은 틔어야 산다는 논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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